베를린의 ‘놀라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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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깃발의 유혹, 미 컬렉터스 룸
한적한 일요일 오후, 베를린 한복판의 미테(Mitte) 거리를 설렁설렁 걷는다. 베를린의 핫 플레이스가 모여 있는 곳이다. 하얀 건물에 내걸린 빨간 깃발 하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비가 내려 축축이 젖은 잿빛 길바닥과 빨간 깃발, 그리고 ‘Me’라고 쓰인 하얀 글자가 경쾌하게 어우러진다. 바람에 우아하게 펄럭이는 깃발이 마치 “안으로 들어와 보지 않겠어?” 하며 나를 유혹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Me’라고 쓰인 큰 글자 아래 ‘컬렉터스 룸 베를린 스티프퉁올브리히트(collectors room berlin stiftung olbricht)’라고 작은 글자가 쓰여 있다. 미 컬렉터스(Me Collectors)라고? ‘미(Me)’라면 ‘나’를 말하나? 내 방 컬렉션…? 아니면 무슨 컬렉터의 방이라고…? 얼핏 미술관처럼 보이는데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슬쩍 보이는 모습은 카페나 레스토랑 같다. 호기심이 생겨 1층 문을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신다. 세련된 디자인의 카페다. 전시공간은 카페를 지나 안쪽에 위치한다. 얼핏 밖에서 짐작하기엔 작은 공간인 줄 알았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꽤나 크다. 높은 천장에 하얀색 벽으로 마감한 전형적인 갤러리다.

 

시그마 폴케의 점(dot)
카페 안쪽 전시공간에서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시그마 폴케(Sigma Polke)’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익숙하지만 시그마 폴케에 대해선 잘 몰랐다. 기존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 여러 종류의 실험적인 프린트 작품, 얼핏 팝아트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전시장 곳곳을 가득 채웠다. 1950년대 이후 대량 생산과 이미지의 복제 기술 발달은 예술가들의 이미지 생산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시그마 폴케는 이렇게 말했다.

“신문이나 TV에 종종 행복한 중산층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건 독일의 경제적 성장을 선전하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는 이런 가식적인 모습을 확대된 망점, 그리고 이미지를 중첩시켜 낯설게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사실 내겐 이런 설명보다 영상으로 본 사소한 에피소드가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사이프러스(Cyprus)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죠. 한밤중에 배가 고파 잠에서 깼어요. 냉장고에 둔 케이크가 생각났죠.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케이크가 없어요!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죠! 그런데 낙담하던 그 순간, 냉장고 안의 조명이 갑자기 내 눈 앞에 반짝반짝 아른거리기 시작했어요. 반짝반짝…”

그 후 폴케는 파란색, 분홍색, 은색으로 반짝이는 사각형을 그린 시리즈를 선보였다. 포장지처럼 반짝이는 종이를 잘라 이미지를 출력해 만든 작업이다. 냉장고 안을 비춘 조명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니, 참 소소하고 귀여운 사람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 프린트를 하는데 프린터가 고장 났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프린트된 이미지가 너무 멋있는 거죠! 난 프린터가 고장 났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작품을 계속 출력했어요. 날마다 어떤 우연한 효과가 나타날까 기대하면서 말이죠. 정확히 17일 후 누군가 프린터를 수리해버렸고, 더 이상 멋진 이미지를 만들 수 없었어요. 도대체 누가 프린터에 손을 댄 거야?! 난 너무 실망했죠.”

그의 많은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통독까지 격동의 변화를 경험한 폴케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뜻밖에 사소하고 우연한 경험으로 만든 작품도 많다. 그는 일상적이며 평범한 경험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고 매순간 새롭게 바라본다. 작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무작정 뭔가 거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지고 이내 불안해진다. 폴케는 거대한 이야기 대신 매일매일 경험하는 작은 일들을 ‘순간의 작품’으로 표현한다. 말은 쉽지만, 쉽지 않은 일 아닌가? 폴케의 많은 작품은 이미지가 확대된 망점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도, 풍경도 점으로 이루어진다. 가까이서 보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언뜻 프린트된 것처럼 보이지만 폴케는 이 점을 전부 하나하나 손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는 세상이 점들로 보여요. 나는 점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점들은 내 형제이고, 나 또한 점이에요.” 

점…? 그가 말한 점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스쳐가는 모든 일상,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과장된 행복,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 역시 세계 안에서, 많은 점과 함께 살아가며 큰 그림을 이루고 있을 뿐이란 의미일까?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내게 점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점이란 아마도 점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우주가 아닐까 싶다. 커다란 우주, 나와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각각이 독립된 존재를 가진 커다란 점, 곧 우주이다.. 폴케의 점에서 우주를 생각한다.

 

분더캄머, 호기심 캐비닛
1층 기획전에 이어 미 컬렉터스 룸 2층의 ‘올브리히트 컬렉션’인 <분더캄머(Wunderkammer)> 상설전을 둘러본다. 독일어 ‘분더캄머’는 ‘놀라운 방’이란 뜻이다. 르네상스 시절, 유럽의 귀족들은 이국적이고 신기한 물건을 방 안 가득히 수집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그런 방을 ‘분더캄머’ 혹은 ‘호기심 캐비닛(Cabinet of Curiosity)’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분더캄머에서는 기이하고 괴이한, 또는 자연에서든 예술에서든 기존 규범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온갖 물건을 볼 수 있다. 미 컬랙터스룸의 분더캄머 역시 해골, 괴상한 동식물, 난장이와 거인의 초상, 기이한 산호, 정교한 시계, 마술 도구, 여러 종교적 소품 등을 전시한다. 베를린이 아니더라도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종종 이런 식의 ‘분더캄머’를 만난다. 비슷한 형식의 전시인데도 나는 늘 분더캄머에 빠져든다. 괴상한 모습을 한 여러 작품 또는 물건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흔든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물건들, 그리고 이를 보면서 상상하게 되는 기이한 이야기에 매료되고, 내 작업 또한 이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평범하지 않고, 예외적이고, 놀라운 물건들만 모아둔 게 이상하다. 예술작품이란 꼭 이렇게 예외적이고 기이해야했을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면 예술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물건을 만들거나 애써 수집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늙은 아기처럼 생긴 생긴 인어, 고슴도치 같은 물고기, 겹겹이 쌓인 해골 더미를 보며 내 호기심은 점점 커진다.

 

개인 컬렉션으로 만든 미술관
알고 보니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은 독일 에센 출신 컬렉터인 ‘토마스 올브리히트(Thomas Olbricht)’의 개인 갤러리다. 2010년 오픈했는데 유럽에서 제일 큰 규모의 컬렉션 룸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오로지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이렇게 큰 건물을 지었다. 컬렉터라고 하면 막연히 예술과 관련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의학자이자 화학자다. 특히 내분비학을 연구했다고 하니 영국 유학시절 즐겨 찾던 ‘웰컴 컬렉션이(Welcome Collection)’이 떠오른다. 의학과 예술에 관한 갤러리인 웰컴 컬렉션 역시 ‘웰컴’이 자신의 컬렉션으로 만든 뮤지엄이자 미술관이다. 웰컴과 올브리히트, 두 사람 모두 의학을 공부했고, 개인 컬렉션으로 미술관을 만들었다. 의학자이지만 예술을 사랑했다. 이들은 컬렉터인 동시에 예술과 과학 콜라보레이터가 아닐까 싶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서는 종종 다양한 컬렉터의 소장품 전시를 볼 수 있고, 컬렉터의 오래된 집을 개조한 미술관도 많지만, 미 컬렉터스 룸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수집한 개인 컬렉터가 새로 지은 최신 건물이다. 단지 개인 컬렉터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예술가 못지않게 예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컬렉터다. 컬렉터가 작품을 사는 건 단순한 쇼핑이 아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컬렉터가 어떤 작품을 사느냐에 따라 아트마켓의 흐름은 순식간에 바뀐다. 컬렉터는 아티스트를 지원할 뿐 아니라 큐레이터나 평론가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진 아티스트를 찾아낸다. 폴 세잔(Paul Cézanne) 역시 모이즈 드 카몽도 (Moise de Camondo)라는 프랑스 컬렉터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졌다.
미 컬렉터스 룸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컬렉션을 공개하고 싶은 이들에게 미술관을 빌려준다는 것이다. 자연히 미 컬렉터스 룸 전시는 2~3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컬렉터에 의해 교체된다. 베를린의 미 컬렉터스 룸은 컬렉터가 수집한 작품을 위한 미술관, 컬렉터의 작품으로 구성되는 미술관이다. 한 마디로 컬렉터만을 위한 특별한 미술관이다. 한편 자기가 수집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개인 컬렉터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럽다. 유럽 컬렉터의 컬렉션 규모는 한국의 컬렉터와 사뭇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베를린의 미술관과 갤러리 정보가 실린 아트 맵에는 아예 ‘프라이빗 컬렉션(Private Collection)’ 항목이 따로 있다. 베를린에서 컬렉터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한 전시 아닌 순수한 개인 컬렉터의 컬렉션을 보는 재미가 기대된다.

비 내린 일요일 오후, 미 컬렉터스 룸의 두 가지 놀라운 방을 둘러보았다. 시그마 폴케의 점으로 둘러싸인 방,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기괴한 물건과 호기심으로 가득찬 방이다. 베를린 어딘가에 숨어 있을 또 다른 분더캄머를 찾아보고 싶다. 참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의 ‘Me’는 ‘Moving Energies(움직이는 에너지)’의 약자다. 두 개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에너지가 나를 움직인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작은 놀라운 방을 갖고 싶다.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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