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진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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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촌(秦雨村, 생몰년 미상)은 인천 태생으로 본명은 종혁(宗赫)이고 우촌은 예명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진우촌이 극작가로 진출한 것은 물산장려회의 희곡 현상 공모에 입선된 후”라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1925년  『조선문단』에 단막극  「구가정(舊家庭)의 끝날」로 데뷔한 것으로 나와 있다.

진우촌은 1926년 배우이며 연출가인 정암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 언론인 고일과 연극단체인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설립하여 인천 연극운동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박아지, 엄흥섭 등과 동인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간행하기도 했다.

“칠면구락부에서는 진우촌이 각색하여 공연한  「춘향전」,  「카르멘」,  「사랑과 죽음」 이외에 수많은 작품을 각색, 연출하였다. 무대 장치는 원우전, 연출은 정암, 각색은 진우촌과 필자가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작품인  「눈물의 빛」을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공연할 때, 주연 송수안 군이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고, 무대 뒤로 숨은 일이 있었다.  <중략> 진우촌이 배경 뒤에서 극본을 크게 읽어 주었건만, 송 군은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가, “여보게, 변소가 어딘가? 나, 소변 좀 보고 옴세….” 송 군은 이 한 마디만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져서 영영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대역을 맡아 본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시국 강연을 한 바탕 하였고, 노파 역으로 분장한 임창복 군을 나오라고 독촉해 전혀 다른 내용의 희극을 연출하고만 일까지 있었으니 그립기도 한 낭만적 시절이 아니던가 싶다.”

고일 선생의 재미있는 회고담이다. 진우촌은 1938년 극단 낭만좌(浪漫座)에서 전속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작품은 장막극  「바다의 남편」을 위시해서 광복 직후 발표한  「두뇌수술」,  「보검」,  「왕소군」,  「죄」 등의 장막극과  「신념」,  「파도」  등 단막극 10여 편이 있다. 연극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 인천에서 활발히 연극 활동을 한 선구자인데 정작 인천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르고 있다. 아직 그의 정확한 생몰년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딱한 우리 실정이다.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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