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을 지키기 위한 한 목소리
김유호 풀등 선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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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노래대회를 나가면 1등 상을 받을 만큼 마을에서는 노래를 꽤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았다. 하나 녹록지 않은 생활에 음악인의 길을 함부로 선택할 수 없었다. 배고픈 생활이 너무나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음악을 접어둔 채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대이작도를 떠나 인천으로 왔지만, 인천에서도 험난한 여정을 치러야만 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에 성공은 했지만, 결국엔 경영상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업실패로 슬픔도 잠시 그의 보금자리였던 대이작도에서 새롭게 출발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36년 동안 이곳에서 열심히 일했고 이제는 제법 여러 척의 배를 운영하는 선장이 되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마음속 허기짐이 시원하게 가시지 않았다. 학창 시절 송골매 김상복 씨의 베이스 소리가 좋아서 첫 기타를 만졌던 촉감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마음에 맞는 주민들과 함께 용기를 내어 밴드<풀등>을 만들었다. 3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 올린 밴드활동으로 막연했던 그의 꿈이 이제는 선명해질 수 있었다. 섬마을밴드 축제를 일주일 앞두고 요즘 대이작도에서 가장 바쁘다는 풀등 선장 김유호 씨를 만났다.

섬마을밴드 이후에 변화된 나 그리고 이웃
젊게는 39세에서 많게는 환갑 이상의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밴드 <풀등>. 밴드를 만들기 전까지는 음악에 대한 배움을 해소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단지 조촐하게 밴드의 구색만을 갖췄을 뿐이다. 그래도 음악을 배우겠다는 간절함과 의지로 밴드 ‘풀등’이라는 완성된 결정체를 만들어갔다.

“음악을 들으면서 함께 젓가락으로 두들기고 빗자루로 베이스 치는 흉내만 냈었어요. 그러면서 밴드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서 인천시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그게 발동의 시작이었어요. 처음에는 악기도 지급받지 못했어요. 앰프 정도만 겨우 받고, 키보드도 기부받았었죠. 그런데 실력은 좋지 못해도 주변 사람들한테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공연할 때마다 악기를 한둘씩 채워나갈 수 있었죠”

베이스를 다시 잡았을 때 갖은 고생으로 뻣뻣하게 변해버린 손은 마음과는 달리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섬마을 밴드 프로그램에서 오신 강사님의 지도 아래 실력은 차츰 나아졌고 그의 일상도 함께 변화였다. 눈뜨자마자 일터로 나가야 했던 단조로웠던 생활에서 벗어난 그의 일과는 베이스를 켜는 것으로 시작해서 끄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가끔 비가 억수로 내릴 때는 배를 출항할 수가 없어 그날은 베이스 연습에만 온전히 집중한다. 다른 선장과 달리 그에게 비 오는 날은 가장 행복한 날이 되었다.

“항상 저녁에 일 끝나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연습해요. 스위치만 켜면 바로 작동될 수 있도록 베이스도 앰프를 꽂아놓은 채로 두어요. 왜냐하면 케이스 열고 꺼내면 결국 연주를 안 하게 되거든요. 눈뜨면 바로 연주할 수 있도록 세팅이 되어 있는 거죠.”

간혹 멤버들의 음악적 취향 때문에 트러블이 발생하지만, 각자 음악에 대한 열정 덕분에 싸우다가도 금방 화가 풀린다. 그렇게 생계로 바쁜 와중에도 밴드 멤버들과 3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늘 하고 싶었으니까.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었어요. 나이 들면 손도 못 움직여서 더는 하기 어렵잖아요. 갈망했던 것을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었으니까.”

이제는 대이작도에서 대표밴드라고 할 만큼 마을에서 그들의 명성은 자자해졌고, 섬마을밴드축제 뿐만 아니라 가끔 다른 곳에서 주최하는 노래대회에 나갈 정도로 패기가 생겼다.

“작년에는 옹진군 대표로 시경연대회를 나갔었죠. 11개 팀이 나갔는데 4등을 했어요. 거기서 1등을 해야지 전국대회를 나가는데 (아쉬워요). 몸도 부들부들 떨면서 가사도 틀렸거든요. 왜냐하면 옹진군민들이 다 보는 자리였어요. 인천 시민 같으면 신경을 안 써요. 우리는 옹진군의 타이틀이니까요. 옹진군 주민한테 인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서울에서 인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에요. 지금 실력이면 1등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동아리 경진대회에서 나간 풀등밴드, 맨 오른쪽 흰모자를 쓰신 분이 김유호 선장님이다.

밴드 <풀등>은 항상 지역과 연계해서 생각한다. 밴드 이름도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풀등’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모든 섬에는 바다와 산이 있고 모래와 갯벌이 있지만, 대이작도는 풀등 하나 때문에 관광객들이 많이 오거든요. 근데, 매번 풀등에 모래를 판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풀등을 알리고 지키자는 의미에서 멤버들과 ‘풀등’이라고 이름을 정한 것이죠. 그러다 보니 그 이후에는 통기타 동아리도 ‘풀등 통기타’라고 이름을 지었더라고요.”

대이작도에 불어난 ‘흥바람’
<풀등> 활동으로 풀등 선장의 삶만 달라진 것은 아니다. <풀등>의 활약과 ‘섬마을밴드 프로그램’ 이후에 대이작도 주민들의 저녁 풍경도 변화하였다. 음악 동아리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주민들이 한둘 늘어나면서 지금은 약 주민 절반이 개인 악기를 직접 사들이어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대이작도는 예로부터 흥이 있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전부터 사물도 하고 꽹과리를 치는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흘러간 노래를 잘 부르시고, 작곡을 많이 하셨던 한 선생님의 영향이 컸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대이작도에서 낚시를 좋아했거든요. 선생님이 굉장히 오랫동안 대이작도에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저희 형님들께 음악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요. 끼가 타고났다고 해도 특정 몇 명이지 마을 전체가 끼가 타고 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분의 영향이 좀 더 부추기지 않았는가 싶어요.”

바쁜 생업으로 잠재되었던 주민들의 흥바람을 섬마을 밴드 프로그램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전에 주민들은 일과가 끝나면 함께 술 한잔 하거나 가벼운 게임을 하며 하루의 시름을 달래는 게 전부였다. 요즘에는 해양생태관에 다양한 동아리들로 북적거려 연습공간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대이작도에 동아리만 총 33개가 있어요. 처음에 우리가 밴드를 하다 보니, 그들을 지도하라고 인천문화재단에서 강사님을 보내주셨어요. 그러다 보니 마을 주민들도 너도나도 기타나 드럼 배운다면서 밴드교실에 들어오게 되었죠. 그래서 지금은 명예회원과 정회원을 정해두고 활동하고 있어요. 명예회원분들께 가끔 행사에 관해서 여쭤보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해요. 작년말부터는 색소폰을 하고 싶다는 분들이 생겨서 최근에는 색소폰 동아리가 만들어졌어요.”

바투 다가온 섬마을밴드축제에 주민들은 맹연습 중이다. 본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주민들은 잠까지 쫓으면서 악기를 연주한다. 연습에 소홀히 하는 주민들에게 ‘잠은 왜 자’라고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다시 연습에 몰입한다. 이런 주민들의 노력으로 올해 섬마을밴드 축제는 실력이 더욱 향상된 다양한 동아리들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게다가 풀등의 엄격해진 역할 배치로 풀등선장님의 노래 솜씨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아우에게 베이스를 해보라고 했죠. 악기 실력은 나아지고 있는데 노래는 열심히 연습해도 잘 안되거든요. 그리고 아우가 기타 치는 실력이 더 월등하니까 이번에는 제가 노래하는 거로 정했죠.”

대이작도 풀등밴드

올해 섬마을밴드를 마치고 나면 또 다른 활동 계획들을 그의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시점에 밴드 풀등은 또 다른 길을 모색하려고 한다. 풀등 선장의 마음 한쪽에 둔 꿈과 함께 말이다.

“내년 중반에 우리 팀이 대관공연을 해요. 콘서트라고 하죠. 우리팀 발표는 한 번도 안 해보았거든요. 그래서 옹진 군청을 대관해서 주민들 앞에서 공연하려고 하죠. 지금 공연 스태프부터 영상 촬영까지 다 생각하고 있어요. 강사 선생님들께 이미 게스트 출연도 부탁드렸고요. 그리고 어중간하게 자작곡을 만든 것도 있는데, 이제 마저 완성해서 공연 때 선보여야죠.”

“대관공연을 기점으로 이제는 실버밴드로 빠지려고 해요. 젊은팀 구성을 해서 나이 많은 우리들은 이제 물러나야죠. 가수 부활도 대관공연 하고나서 원년 멤버가 밀려나가고 새로운 기수가 나오잖아요. 이게 다 선생님께 배운 지식이에요. 양보할 줄도 알고, 후배들도 키울줄 알아야 하죠. 그게 밴드 공연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이러면서 풀등도 이름도 안 바뀌고 유지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실 음향감독을 하고 싶어요. 음향기계를 잘 다루면 디지털도 음악 가능하니까요. 지금 풀등밴드에서는 기계를 잘 만질 수 있는 친구가 없거든요. 막상 배우려니까 쉽지 않은데 풀등밴드 곁에서 음향감독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요.”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이진솔(정책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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