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빛 아시아
“아시아 대륙의 끝이라고?”
말레이시아 친구 제이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싱가포르가 아니고?”
제이슨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제이슨에게 말했다.
‘싱가포르는 섬이잖아, 섬!
제이슨과 말레이반도 최남단 탄중피아이(Tanjung Piai)에 가는 날이다. 대륙의 끝에 간다는 비장한 마음도 잠시, 그의 차를 타고 조호바루에서 80km를 달려 너무나 편안하게 탄중피아이에 도착했다. 문득 지난겨울에 갔던 유럽대륙의 끝이라 알려진 포르투갈 호카곶(Cabo da Roca)이 떠오른다. 이때도 관광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도착했었지….피식 웃음이 난다. 대륙의 끝, 세상의 끝일지도 모르는 곳에 가는데, 이렇게 쉽게 가도 되는지 마음이 어수선하다. 엄청난 바람이 몰아치던 호카곶과는 다르게 탄중피아이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외국인은 20링깃, 현지인은 5링깃이라는 입장료 때문일까? 국립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방에 떨어진 쓰레기와 조악한 조형물이 신경을 거슬린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나무다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경주하듯 걷는다. 빨리 건너가서 일단 좀 앉고 싶은 마음뿐이다.
탄중피아이 조형물
바다를 향해 뻗은 나무다리
우리에겐 아시아 대륙의 끝이지만, 과거 유럽인들에겐 아시아 식민지배의 관문, 새로운 대륙의 시작이었을 탄중피아이에 드디어 도착했는데 왠지 좀 시시한 것 같아 기운이 빠진다. 대륙의 끝 혹은 시작, 어쩌면 세상의 끝과 시작이라는 낭만적인 감상에 빠지기엔 팔토시를 입고 소리치는 제이슨과 버려진 쓰레기들이 자꾸 나의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일까? 문득 꼼지락거리는 다리 달린 물고기 비슷한 것이 시선을 잡아끈다. 물고기도 아닌 것이 육지 동물도 아닌 것이 지느러미 같은 다리로 빠르게 진흙 위를 걸어 다닌다. 말뚝 망둥(mudskipper)이다. 말뚝망둥이는 360도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온 사방을 다 볼 수 있으면 앞으로 걸어야 하나 뒤로 걸어야 하나…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눈을 가진 이 망둥이는 어쩌다 진흙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 잠시나마 이들처럼 전지전능한 눈이 달리면 어떨까 하는 짜릿한 상상에 빠진다. 주변엔 거대한 뿌리를 가진 맹그로브(mangrove) 나무가 가득하다. 나무 몸통의 옆 가지가 주욱 뻗어 나가 뿌리로 합쳐진다. 이 나무들은 옆의 나무뿌리와 얽히고 또 그 옆의 나무뿌리와 합쳐진다. 맹그로브 나무는 이렇게 옆의 나무뿌리와 얽히고설켜 쓰나미를 막는 역할을 한다. 중생대 백악기 말기부터 존재했다고 하니 이들은 공룡이 왜 사라졌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맹그로브 나무
말뚝망둥이
탄중피아이의 바다는 황토빛이다. 작년 겨울 유럽대륙의 끝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본 검푸른 대서양 바다와는 영 다르다. 누런 황토 바다가 눈앞에서 넘실거린다. 호카곶처럼 세상의 끝이라면 떠올릴 법한 가파른 절벽, 혹은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깊은 푸른색의 바다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의 끝에서 만난 바다는 탁한 황토빛이다. 거센 바람 대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쬔다. 전망대 바닥엔 친절하게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방향을 표시한 화살표가 붙어있다. 끝,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 같다. 바다 곳곳엔 엄청난 기계 소음을 낼법한 거대한 배가 유유히 떠다닌다. 게다가 그 옆에는 커다란 건설현장도 보인다. 수백 년 전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거친 대서양을 건너 말라카 해협을 따라 탄중피아이에 도착했을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탄중피아이는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으로 갈 수 있는 동남아의 관문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대륙의 발견, 곧 식민시대의 시작이 바로 이곳 탄중피아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탄중피아이의 황토빛 바다
거대한 배가 떠있던 탄중피아이의 황토빛 바다
나에게 탄중피아이는 대륙의 시작과 끝이라기보다 경계의 장소, 처음과 끝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느껴진다. 땅과 하늘 사이, 바다와 육지 사이, 그 어딘가의 공간에선 황토 빛 바다가 출렁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 서로의 뿌리를 얽히고설켜 거대한 쓰나미를 막는 맹그로브 나무에서 함께 역경을 헤쳐가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비한 맹그로브 나무와 말뚝망둥이, 대륙의 끝에서 만난 또 다른 건설 현장, 살이 타들어 갈듯한 뜨거운 날씨, 황토빛 바다, 숨어있는 원숭이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들, 이곳은 마치 신비하고 영험한 장소 같으면서 또 혼란스러운 현실 세계다. 과거나 미래로의 공상에 빠지기엔 눈앞의 어지러운 현실이 자꾸 나를 붙잡는다. 난 지금 어디에 서 있나. 말레이시아의 끝인가 시작인가, 싱가포르의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인도네시아의 위인가 아래인가.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땅 위인가 바다 위인가. 혼란스러운 이곳이 마치 아시아의 얼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전망대 바닥에 붙어있던 방향표시
탄중피아이에 도착한 수백 년 전 유럽인들을 떠올리니 시간은 어느새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거대한 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쳤던 유럽대륙의 끝, 포르투갈 호카곶으로 다시 돌아간다.
검푸른 유럽
우르릉 쾅쾅, 샤아아아~
파도 소리가 마치 천둥번개처럼 요란하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소리에 덜컥 겁이 난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데다 바람까지 불어 꼴이 말이 아니다. 타박타박 바다를 향해 걷는다. 하필 오늘따라 운동화가 아닌 단화를 신고 나와 산길을 걷기가 영 불편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탁 트인 절벽 아래로 대서양이 펼쳐진다. 구름 틈새로 빠져나온 빛이 바다에 툭 떨어진다. 빛이 떨어진 바다가 하얗게 반짝인다. 하얀 바다를 본 적이 있었나… 반짝이는 하얀 바다는 계속해서 점점 더 넓어진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지 거대한 대서양 어딘가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움직인다. 모든 게 가짜 같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포르투갈인들이 말하는 ‘사우다테(슬픔)’가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은, 우리는, 저 바닷속으로 모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대항해 시절 포르투갈인들은 이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시절 그들이 바라본 바다는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저 수평선 넘어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길래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항해를 시작했을까? 그들에겐 정말 이곳이 세상의 끝이었을까? 끝이었기에 시작을 향해 나아간 걸까?
포르투갈 호카곶
호카곶에서 바라본 바다
사실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는 말은 참 자기중심적이다. 이곳은 유럽대륙의 최 서쪽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졌다. 또한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이스(Camoes)는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Aqui Ondi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이라 말한 곳으로 매우 유명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심지어 버스를 타면 친절하게 ‘세상의 끝’ 바로 앞까지 데려다준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에 너무 큰 환상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정한 끝이 아닌가. 그들이 정한 시작과 끝. 그리고 내가 정한 시작과 끝, 결국엔 내가 가는 곳,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각자의 시작이자 끝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곳은 과연 나에게 끝일까? 아니라면 과연 그곳에 언제 갈 수 있을까?
포르투갈에서 바라본 다양한 수평선
포르투갈에서 바라본 다양한 수평선
나에게 이곳은 거대한 대서양 바다를 만난 곳, 바다 넘어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한 곳, 하얀 바다를 본 곳, 무거운 파도를 느낀 곳, 그리고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생각지 못한 포르투갈인들의 ‘사우다테’를 느낀 곳이다. 세상의 끝, 포르투갈 호카곶을 다녀와 2018년 세마(SeMa) 창고 개인전에서 선보인 드로잉 시리즈 ‘수평면 환상’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승연, 수평면 환상(14개의 드로잉 시리즈), 28x28cm, 펜드로잉, 2018
세상 끝에 도착하니 수평선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수평선이 아니라 수평면이다.
내게 이곳은 세상의 끝, 누군가에겐 세상의 시작, 누군가에겐 오줌싸는 곳, 물론 나도 덤불속에
2018 세마창고 개인전 설치사진
우연일지 필연일지 2년에 걸쳐 아시아 대륙의 끝과 유럽대륙의 끝을 가볼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황토빛 바다와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여정은 다시 아시아로 돌아간다. 시간은 다시 호카곶에서 말라카로 넘어간다. 수백 년 전 포르투갈인들이 폭퐁 같은 이 대서양 바다를 건너 도착한 말라카 해협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바다 위를 걷다
바다 위를 걷는다. 바다 위에서 뛰기도 하고 음식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게다가 공연도 보고 수영도 하고 잠도 잔다.
우연히 크루즈를 타게 되었다. 망망대해 바다에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하는 겐팅 드림 크루즈다. 말레이반도를 따라 피낭, 푸켓, 랑카위, 포트클랑, 6일간 4개의 기항지,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3개국을 지나가는 여정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다섯 밤을 잔다니…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탄 겐팅드림호가 지나갈 말레이 해협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본 대항해 시대를 기념한 동상의 주인공들이 지나간 길과 겹치기도 한다. 몇백년 전 그들이 지나간 바닷길을 직접 지나간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 호카곶에서 바라봤던 거대한 대서양 바다가 떠오른다. 지구가 터질듯한 엄청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했던 포르투갈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 옛날, 이 망망대해를 배 타고 몇 달을 걸쳐 항해해왔던 사실이 한편 경이롭다. 그들이 탄 배는 지금처럼 호화롭지도, 튼튼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바다를 건너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을까? 거대한 배에 잠시 탔다고 탐욕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의 감정을 헤아리는 내 모습이 놀랍다. 한편 이들이 대서양 바다를 건너와 첫 식민지로 삼은 말라카 말레이인들의 심정도 동시에 떠오른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영국, 일본까지 말라카 해협을 통해 들어온 이들에게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던 그 당시 말레이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포르투갈에서 본 대항해 시대 동상
겐팅드림크루즈
오늘날 말라카 해협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이다. 이곳을 지나지 않고 우회하면 3일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전 세계 선박이 실어 나르는 화물의 ¼정도가 이곳을 지나간다고 하니 현대의 실크로드로 불릴만하다. 실크로드이지만 동시에 해적 출몰이 전 세계에서 가장 번번한 곳 역시 말라카 해협이라고 한다. 수심이 얕아 배가 천천히 지나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루즈에서 보내는 3일째, 크루즈 안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어제 내린 기항지 태국 푸켓은 싱가포르보다 한 시간이 느리다. 다만 크루즈 안에서의 시간은 출발지인 싱가포르 시각을 따르기에 배에서 나오는 순간, 한 시간을 버는 셈이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니 디지털 핸드폰 시계는 계속 오류가 난다. 전자시계는 믿을 수 없기에 아날로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초호화 배를 타고 3000여명의 승객이 여행하는 거대한 배이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어쩌면 지구 한가운데서 전자기기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
이곳에선 3000여명, 30여 개국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는데 웨스턴, 아시아, 하랄, 인디언 음식까지 정말 다양하다. 한쪽에선 인디언 가족이 손으로 카레를 먹고, 다른 한쪽에선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들이 하랄 뷔페 앞에 줄을 선다. 또 다른 한쪽에선 싱가포르, 혹은 홍콩 관광객들이 아이들과 함께 접시를 여러 개 쌓아놓고 식사를 한다. 아침부터 요가, 시네마, 모노폴리부터 각종 게임, 수영장, 스파, 저녁엔 공연과 주크클럽 등 크루즈 안은 잠시도 한가할 시간이 없다. 크루즈는 부유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조용히 여행하는 거라 생각했다. 비싸고 심심하고 느린 여행이 내 머릿속 크루즈였다. 실제 와본 크루즈는 내 상상과는 반대의 세계다. 크루즈를 타기 전엔 말레이반도를 따라 항해하는 2200킬로의 거대한 여정과 이 길에 얽힌 이야기를 상상했다. 크루즈는 별세계다.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상념에 빠지기엔 크루즈 안은 너무 바쁘다.
크루즈 내부
그러나 움직이는 바다를 보고, 움직이는 수평선을 보고, 힘차게 나아가는 뱃길을 보니 바다가 더는 쓸쓸히 바라만 보는 곳이 아니라고 느낀다. 선미에 서서 바다에 새겨졌다 사라지는 거대한 뱃길을 바라보는 건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바다 위에선 금방 사라져 버리는 이 뱃길처럼 우리는 매 순간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크루즈 안에선 1분 1초가 바쁘다. 그런데도 매 순간에 뱃길처럼 계속 사라진다.
선미에서 바라본 뱃길
전진하는 지구
크루즈는 움직이는 지구 같다. 단 매일 자전하는 지구가 아닌 매일 전진하는 지구다. 지구가 매일 한 바퀴씩 도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크루즈 안에선 배가 움직이는지 잘 알지 못한다. 바다에는 수많은 길이 숨어있다. 바다에 들어와 바다를 바라보니 반짝이는 바닷길이 보인다. 햇빛이 바다를 내리쬐는 찰나의 순간 바다엔 길이 난다. 때로는 배가 지나갈 만큼 넓게, 때로는 가느다란 실처럼, 때로는 미로처럼 바다에 길이 생긴다. 빛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햇빛이 만든 바닷길
햇빛이 만든 바닷길
바다에는 움직여야만 보이는 길도 있다.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다. 배가 나아갈 때 선미에 서면 바닷길이 갈라지며 생기는 마술 같은 길을 볼 수 있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갈라지며 길을 만든다. 움직이지 않으면 길은 곧 사라진다. 작년 겨울 포르투갈 라고스에서 지내며 바라본 검푸른 대서양 바다에선 길을 보지 못했다. 바다 밖에서 바라본 바다는 쓸쓸했다. 눈앞의 파도보다 저 멀리 갈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 수평면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고 그렸다. 아마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수평면을 바라보며 본 환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탄중피아이에서 바라본 바다는 황토빛이었다. 세상 끝 어수선한 모습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대륙의 끝, 세상의 끝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기항지처럼 느껴졌다.
이번 겨울 말라카 해협에 들어와 바라본 바다에선 더는 수평선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곳에선 매일 바다 위에서 길을 찾는다. 매일 아침 문득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마법 같은 길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길을 기록하기 위해 배 안을 바쁘게 걸어 다닌다. 거대한 바다에, 거대한 지구에 잠시 흔적을 남겼다 사라지는 이 길은 결국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마법처럼 나타났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이 길처럼 내 찰나의 순간도 빛이 나길 꿈꾼다.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는 여러 배들이 만든 작은 바닷길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는 여러 배들이 만든 작은 바닷길
글 / 이승연
사진 /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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