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소개
올 한 해,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해 활동할 2018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새로운 주인공들이 뽑혔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연구와 창작활동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창작지원 프로그램과 발표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2018 레지던시 프로그램 입주 작가를 소개합니다.
구나 작가는 조소를 전공하고 회화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작가는 ‘창작’을 언어로 표현하기에 항상 부족함이 앞서는 지점(이해의 공백들)을 매번 실패의 장소로서 천천히 번역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작가에게 실패의 장소는 매번 반복 행위가 다르게 이뤄지는 장소로,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겹쳐지는 공간이다. ‘무엇을 그릴까, 무엇을 만들까’가 아닌 ‘텅 빈 곳(하얀 캔버스와 비워진 벽 그리고 바닥)에 어떠한 (빈)공간을 물어야할까’를 늘 고민한다. 작가는 그 고민 안에서 천천히 번역하는 과정으로 창작을 이어오고 있다.
<소년들>. 캔버스에 유채. 144.5x147cm, 2018
# 현재 전시 소개
<친애하는 사례에게, 진정으로 부끄러움과 함께(Dear case, Sincerely, with ashamedness)는 2018년 10월 14일(일) 인천아트플랫폼 윈도우갤러리에서 입주 작가 구나의 개인전이 진행된다. 전시제목은 엽서 형식에서 차용한 것으로서 엽서는 수신인에게 도착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노출될 가능성과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작가는 노출된 채 목적지로 향해 이동 중이거나 행방불명이 될 수 있는 불명확한 상황에 놓인 엽서를 윈도우 갤러리로 설정하여 전시를 구성하였다. 발신인은 공간에서 부끄러움을 써 내려가고, 부끄러웠던 수많은 사례들에게 발송을 한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부끄러움에 관한 고백의 전달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의미의 확보가 아닌 실패의 반복을 통한 물음의 과정으로 전시를 준비하였다. 본 전시는 인천아트플랫폼 B동 및 창고갤러리에서 진행되는 <2018 플랫폼 아티스트> 展과 함께 11월 18일(일)까지 진행된다.
《친애하는 사례에게, 진정과 부끄러움과 함께》 전시 포스터 이미지 | 《친애하는 사례에게, 진정과 부끄러움과 함께》 전시 전경 |
# Q&A
Q. 창작의 관심사와 내용, 제작 과정에 대하여
A. 페인팅과 입체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작품설명은 곤경에 빠진 것처럼 늘 어렵고 그런 저의 모습에 반성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물리적으로 작업이 완료된 상황에서조차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방관임을 기억하고 연루된 자로서 느리지만 오래도록 번역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언어로 표현하기에 항상 부족함이 앞서는 이해의 공백들을 매번 실패의 장소로서 그림을 그리고 입체를 만들어 왔습니다.
<더블>, 캔버스에 유채, 135x165cm, 2016
대부분 페인팅은 이미지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적으로 포착된 이미지들은 짧은 순간에 감정이 넘쳐흐르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품에서 넘쳐흐른다는 의미는 한 이미지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겹쳐져 어찌할 수 없는 멜랑콜리(melancholy)를 얘기합니다. 멜랑콜리를 무엇으로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하며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캔버스라는 장소에 옮겨 놓았습니다. 그저 옮겨 놓는다면 사적으로만 머물 수 있기에 그 불가능함이 증후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고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나의 검은 갈색>, 썩고 건조해진 채소 및 과일과 빵, 종이 롤, 라텍스, 흙, 비닐, 테이프, 스펀지, 나무, 폴리스티렌, 가변크기, 2016
입체 작업은 ‘형체’와 ‘제스처(gesture)’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다 남겨진 것들,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들, 그리고 인물 각자의 특유한 자세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발견된 장면은 페인팅 작업 이미지와 역할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멜랑콜리를 입체로 옮겨 놓습니다. 옮기는 과정은 각기 다른 상황과 장소에서 발견된 형체(제스처)를 시간에 맡긴 채 곁에 두고 지켜봅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들을 조합하고 추상적인 심상을 드러냅니다.
제 작업이 이미지와 물체라는 실질적인 물질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것들과 일치하는 부분과 동시에 엇나가는 부분들이 또렷해진 채 무언가로 놓이게 됩니다. 포착과 발견 그리고 무언가로의 재구성은 폭력성과 유약함이 수시로 교차함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이해의 공백들을 만들고 저는 실패의 반복을 통해 명중함의 찰나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나의 검은 갈색> 설치 일부, 썩고 건조해진 채소 및 과일, 종이 롤, 라텍스, 흙, 비닐, 테이프, 나무, 가변크기, 2016 |
Q. 대표적인 작업 소개
A. 2017년 겨울에 진행한 《비스듬한 뼈와 늘어진 말(Askew Bone and Stuttering)》 개인전은 나와 상대 즉 얼굴과 얼굴의 만남이 실종된 채, 그 사이를 메우는 공허한 것들을 더딘 말의 건넴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그 중 <나비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밤들>이라는 작업에 관하여 얘기하려 합니다.
개인전을 준비하는 공간에서 길고양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늦여름 한 길고양이는 만삭이 되어서 배가 땅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그 고양이는 사실 몇 개월 전부터 저의 공간에 자리를 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삭의 고양이를 끝내 저의 공간으로 환대하지 못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 밤마다 우는 고양이 소리에 죄책감에 시달려 마음과 몸을 움켜쥐게 했습니다. 조금 생소한 전환일 수 있지만, 저는 노숙자 앞에 놓인 깡통에 무리 없이 돈은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포옹하고 초대할 용기는 언제나 없었습니다. 환대의 공간은 상처받을 가능성이 널려있고 서로의 위치가 뒤바뀔 위험성 등으로 인해 망설임이 가득해집니다. 이러한 환대의 어려움을 사적인 고백을 통해 작업으로 내놓았습니다. 고백으로 끝낸 이 작업을 통해 환대의 실패가 무엇을 초래할 수 있는지, 그런데도 환대는 중요한 것인지에 대하여 다음 작업의 간격을 좁혀 나가려 합니다.
나비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밤들(Nights that Can Not Sleep with Her Worries), 2017
(회화) 캔버스에 유채, 164x64cm, 2017 (입체) 돌, 나무, 인체 뼈 모형, 인조 머리, 비닐, 흙, 유토, 과슈, 87(w)x44(h)x32(l)cm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 등
A. 시각 예술가, 영화감독, 소설가, 철학가, 뮤지션 등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영감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들을 통해 놀라고(suspense) 감탄한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일 텐데요. 그들을 통해 익숙하지 않거나 누군가에게 혐오스러운 부분들을 세심하게 말을 건넨다면, 보는 이들은 결국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나가게 됩니다.
걸어가는 이웃을 바라보는 눈, 세라믹, 라텍스, 인조머리, 흙, 유토, 천, 철사, 나무, 과슈, 30(w)x145(h)x30(l)cm, 2017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저에게 예술은 끊임없는 자기반성입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그것이 왜 사소하고 정말 사소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지며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그런 과정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예술을 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작은 확신으로 재차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저는 기어코 무언가를 만들며 기어코 그것을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보이게 한다,’는 이 능동적인 말 앞에 책임감을 먼저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아직 실천이 부족하여 이러한 말의 앞섬이 부끄럽습니다.
관객들에게 저의 작업을 통해 배제되어 미처 생각되지 못했던 부분들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유연함과 그 안에서 각자의 미적 요소를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코코아를 마시는 남자, 캔버스에 유채, 162x97cm, 2017
안나, 캔버스에 유채, 104.5×111.5cm, 2018
Q. 앞으로의 작가로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하여
A.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너의 작업은 잘 모르겠어.” 그러면 저는 한때 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다수에게 설득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대답에는 회피가 숨겨져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사실 나 자신도 무엇인지 잘 몰랐음을. 그래서 모른 채 표현하고 그러기에 그것을 보는 이는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술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위험요소라 생각합니다. 저는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말하며 전달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심하게 표현해도 그 틈은 늘 가까이 있으며 공감이라는 것을 무의미로 무마시키고 싶을지라도 말입니다. 세심하고 예민하게 반복하고, 그리고 다른 반복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예술을 하는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