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2동, 삼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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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은 전근대 시기 넓은 평야를 이룬 농업의 중심지였다. 이런 모습은 1899년에 인천과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이 개설되면서 점차 그 모습이 변화했다. 일제는 부평지역의 토지와 쌀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부평역을 통해 인천항으로 반출되었다. 또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이에 따른 원활한 무기 공급을 위해 군수물자 제조·보급공장인 조병창과 더불어 다양한 군수공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40년에는 부평을 인천으로 편입시키고 조병창을 더욱 확장했다. 이런 변화는 부평지역의 모습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부평 곳곳에 남아 있는 군수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이다.
부평 최초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는 1937년 일본의 히로나카상공[弘中商工]이 현재 부평2동에 조성하였다. 이후 무리한 확장으로 경영난을 겪던 히로나카상공을 미쓰비시가 인수하면서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도 미쓰비시의 소유가 되었다. 미쓰비시는 한자로 삼릉(三菱)이라 쓰는데 이런 연유로 지금도 부평 2동 및 인천지하철 1호선 동수역 주변은 삼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쓰비시에서 ‘미쓰’는 삼, ‘비시’는 마름모, 즉 ‘세 개의 마름모’를 뜻한다.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를 정부에 납품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성장한 대표적 전범(戰犯)기업이다.
(좌측은 일본의 대표적 재벌그룹 미쓰비시(Mitsubishi)의 로고)

 

1948년 당시 사진 (출처: Norb-Faye)

위 사진은 1948년 당시 부평의 모습이다. 사진의 제일 위쪽에는 미쓰비시 공장이 있으며, 그 아래로 사택, 합숙소, 공동목욕탕 등이 있다. 이중 미쓰비시 공장 자리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였다가 한국군 부대를 거쳐 2002년부터 부평공원이 되었다.

 
1947년 항공사진, 미쓰비시 공장 및 사택 위치
(출처: 인천시 지도포털)
  2016년 항공사진
(출처: 다음지도)

미쓰비시 군수공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징용(강제노역)을 피하고자 입사했지만, 그렇다고 처우가 좋았던 건 아니었다. 이들은 오전 8시부터 하루 10시간 근무하며 낮은 임금을 받았다. 또 일본인들만 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부실한 도시락을 가지고 여럿이 모여 식사를 해결했다. 이렇듯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일본인과 차별을 받았다.

지도에서 보다시피 미쓰비시 공장을 가려면 철길을 건너야 했다. 출퇴근길 매일 위험한 철길을 건너다보니 인명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이 밖에도 공장에서 각종 기계를 다루면서 손, 팔 등을 다치거나, 절단되는 사고가 잦았다. 그런데도 미쓰비시는 제대로 된 의료시설을 갖추지 않았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던 군수공장 취직도 이름만 다를 뿐 강제징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안남로 부근에 조성된 주택지는 공장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구(舊)사택이라 불린다. 주택 일부는 철거와 증축 등으로 형태가 바뀌기는 했으나 당시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건물의 끝에는 공동화장실을 두어 사용하였는데, 그 입구가 너무나 비좁았다.

부영로 부근의 신(新)사택은 구사택보다 나중에 지었는데 내부 구조는 방1 , 부엌 1로 같다. 그러나 방에 깔리는 다다미 크기로 볼 때 신사택이 7조 1반, 구사택은 4조 반으로 신사택이 구사택보다 조금 더 넓었다. 일반적으로 다다미 한 장의 크기는 약 180X90.0cm 정도로 이곳에서 몇 명이나 함께 생활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2016년 수치지도, 남아있는 줄사택 위치   구사택지 공동화장실(2016년 촬영)
 
구사택지 전경(2016년 촬영)
 
 
신사택지(2016년 촬영)
 
2018년 일부 철거된 현재 모습

얼마 전 신사택을 다시 찾았을 때 건물 일부가 철거되고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들 사택은 올해 초, 도시의 흉물이라는 이유로 전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생활여건 개선과 함께 ‘줄사택’ 8채를 리모델링하여 박물관으로 재탄생시키기로 합의하였으나, 최근 주민들의 반대로 보존계획이 백지화되고, 향후 미군기지가 반환되는 자리에 박물관 건립이 논의 중이다.

줄지어 늘어선 독특한 경관에 서려 있는 수탈의 상징 줄사택을 둘러싸고 주민의 이해관계와 역사유산의 보존이라는 양쪽의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줄사택은 계속 훼손될 것이고 결국에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역사를 입증할 유산은 사라져갈 것이다. 이제라도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근대유산 보존을 위한 조정이 이루어져 강제노동의 현장과 노동자들의 아픔을 기억해 줄 공간으로서 줄사택이 지켜지길 바란다.

글/사진/도면 이정화(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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