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닫힌 도시를 열다” – 인천시립박물관 이동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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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닫힌 도시를 열다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을 시작으로 원산, 인천 등 세 항구가 차례로 개항하였다. 개항 후 세 도시는 각각의 특성을 유지한 채 근대도시로 발전해 갔고, 원산은 러시아 및 일본과 연결되는 지리적 특성으로 동해안의 상업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분단을 맞이하면서 원산은 우리에게 닫힌 도시가 되었다.

개항 이전

함경도 남부, 강원도 북부에 위치한 원산은 한반도 동북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함흥평야의 곡물과 강원도의 광물이 모두 모이는 곳이었으며, 자연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항만으로서 풍부한 수산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입지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러시아는 원산을 포함한 영흥만 일대를 Port Lazaref라고 불렀으며 영국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원산을 선점해야 했으며, 일본 군부에서는 원산의 개항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동여지도 중 원산의 위치 /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원산의 개항

1876년 체결한 강화도조약에는 부산을 제외하고 구체적인 개항지를 명시하지 않았다. 처음에 일본은 함경도 문천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 일대가 조선 왕조의 발원지이며 정숙왕후(태조의 증조모)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1878년 4월 일본은 동해안의 개항장 후보지를 조사하고자 군함을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으나 일본 군함장 마쓰무라 야스타네[松村安種]는 강화도조약을 근거로 측량을 이어갔다. 일본은 측량을 통해 원산 입지의 중요성을 상세히 파악하였고 덕원부 원산포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문천의 전례를 들어 원산의 개항을 반대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능침과 가깝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출생지라는 이유에서,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원산을 개항하여 기반을 만들고 러시아가 북쪽에서 호응한다면 함경도가 앞뒤로 공격받게 되는 모양새였다. 조선 정부는 대안으로 함경도 북청(北靑)을 개항장으로 제시하면서 북청이 좋은 땅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아니니 개항하기 편리할 것이라고 일본을 설득했다.
하지만 1878년 9월 29일 일본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는 조선이 처음에 덕원의 개항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 점을 들어 계속해서 원산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능침이 근접한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일본에서 그 소재지를 명확히 구획하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한 데 따라 1879년 7월 4일 원산 개항에 동의하였다.

원산사진엽서(원산전경) / 출처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나라 안의 나라, 조계

일본은 원산 개항과 동시에 일본 조계를 설정했고 1880년 5월 20일, 일본 영사관원과 상인 200여 명이 원산에 도착하였다. 개항 초기의 원산은 인가만이 드문드문 있었던 지역으로 처음부터 새로 개발해야 했다. 조계지 안에 있는 23호의 가옥은 일본 영사관이 매수하여 철거하였고 습한 땅이었기 때문에 도랑을 파서 배수가 되도록 했다. 시가지의 구분은 약 1,200평을 1구(區)로, 각 구의 사이에는 폭 4칸의 길을 냈고 부두에서 조계지까지 폭 6칸의 큰 도로를 만들었다. 1880년 7월 3일부터 부두 공사를 착수하는 동시에 영사관과 관사, 병원, 은행 등 관공서와 생활필수시설을 건설했다. 1880년대 원산에는 일본 제일은행 출장소를 비롯하여 미쯔비시 등 20개 회사가 들어왔다.
개항 초기 원산에 조계를 설정하고 관공서와 주택을 짓고 있던 일본인에 대해 조선 사람들의 반감은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감정은 때때로 투석과 욕설의 형태로 나타났다. 심할 경우 야간을 틈타 그들의 가옥과 상가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탓에 일본 상인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새롭게 개항한 인천과 외국인의 상업행위가 허용되었던 서울 양화진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원산에서 일본 상인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다른 개항장과 마찬가지로 원산으로 유입되는 일본인의 수가 늘어갔으며 도시의 규모도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확장되어 갔다. 관공서, 학교 등 공공시설과 은행, 회사 등의 업무시설 및 상업시설이 꾸준히 들어서며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원산사진엽서(원산중정통) / 출처 : 인천시립박물관

근대기의 원산은 한반도 동해안의 중요한 항구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쟁취하고 주권을 되찾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원산은 닫힌 도시가 되어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140년 전 문을 열었고 75년 간 닫혀있던 도시 원산의 모습을 12월 15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다시 보려 한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연구원 이동영(李東映, Lee Dong-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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