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속 지폐에 남겨진 시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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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속 지폐에 남겨진 시대의 기록

인천시립박물관에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약 1년간 인천에 근무했던 미군 병사 사무엘 로씨(Samuel. P. Rossi)의 가족이 기증한 그의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유품들은 정장과 약장, 배지와 사진, 잡지, 군복 등으로 대부분 부대 근무 시절의 것으로 보인다. 유품 중에서는 인천에서 근무하며 촬영한 사진과 자료를 모아놓은 앨범이 눈길을 끈다. 앨범에는 부대 마크와 달력, 인천의 지도를 비롯하여 광복 직후의 인천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붙어 있으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지폐와 미군이 쓰던 군표도 남아 있다.

앨범에 한 장 한 장 붙여져 있는 지폐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무엘 로씨가 앨범 속에 남겨놓은 지폐에서 광복 전후로 변화하는 시대의 기록을 찾아보고자 한다.

「사진 1」군복을 입은 사무엘 로씨의 사진(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2」사무엘 로씨 앨범 중 지폐가 부착된 첫 번째 면(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3」사무엘 로씨 앨범 중 지폐가 부착된 두 번째 면(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4」사무엘 로씨 앨범 중 지폐가 부착된 세 번째 면(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군국주의의 잔재

「사진 5」일본정부 발행 50전(센) 지폐 「사진 6」일본정부 발행 10전(센) 지폐 「사진 7」일본정부 발행 5전(센) 지폐

앨범에 부착된 지폐는 총 13장으로 3면에 걸쳐 붙여져 있는데, 이 중 일본 지폐는 3장이다. 지폐 모두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하였으며, 물자의 부족으로 동전을 만들기 어려워지자 만들어진 소액 지폐들이다.

첫 번째 면 오른쪽 아래에 붙여진 것은 50전(센) 지폐로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주요 도안으로 하였다. 오른쪽 위에 등장하는 새는 ‘금치(金鵄)’로 일본을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진무 천황이 정벌을 나갔을 때, 금색 빛을 발하면서 나타나 적군의 눈을 멀게 하여 승리를 도왔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금치는 주로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일본제국 시기 동안 훈장과 우표 등에 도안으로 쓰였다.

두 번째 면 왼쪽 위에 붙여진 지폐는 10전(센) 지폐로 주요 도안은 팔굉일우탑(八紘一宇塔)이다. 탑은 진무 천황이 즉위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일본 황기(皇紀) 2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40년에 미야자키시에 만들어졌다. ‘팔굉일우’는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일본 군국주의가 내세운 주요 슬로건 중 하나였다. 현재도 탑은 남아 있으며, 평화의 탑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팔굉일우라는 글자는 그대로 남아있다.

두 번째 면 왼쪽 가운데 지폐는 5전(센) 지폐로 주요 도안은 도쿄에 세워져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동상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천황과 조정이 둘로 분열되었던 14세기 일본 남북조시대의 무장으로 당시의 무신정권인 아시카가(足利) 막부 측이 내세운 천황(북조)에 대항하여 남조의 천황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일본제국 시기에는 충신의 표상과 일본인의 귀감으로서 교육되었다.

「사진 8」중국 중앙저비은행 발행 지폐

세 번째 면에는 중국의 지폐 3장(5위안, 10위안, 100위안권)이 붙여져 있는데, 정확히는 중일전쟁 중이었던 1940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 통용되었던 지폐이다. 일본은 중국의 점령지에서 표면적으로는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며, 중화민국의 주요 정치인이었던 왕징웨이(王精衛)를 내세운 괴뢰 정부를 세웠다. 지폐 역시 중국의 중앙은행과는 별도로 중앙저비은행(저비는 비축, 저장을 뜻함)을 설립하고 중국의 국부로 평가받는 쑨원을 도안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전쟁 중인 일본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중국의 경제를 장악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미군의 주둔

「사진 9」미군 발행 A호 100원(엔) 군표 「사진 10」미군 발행 1달러 군표(시리즈 461)

두 번째 면에 부착된 왼쪽 가장 아래와 오른쪽 전체 총 4장의 지폐는 미군이 발행한 군표(軍票)이다. 군표는 주로 해외에 주둔하는 군대가 필요한 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할 때 주둔군의 본국 화폐 대신 발행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하는 특수한 화폐이다. 50전(센), 1원(엔), 100원(엔) 군표(A호 군표)는 미군이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면서 1945년 9월 발행한 것이며, 군표에 알파벳 A를 표시하여 사용지역을 구별하였다. 이외에 B로 표시하여 발행한 군표도 있는데, B호 군표는 역시 미군이 주둔한 오키나와에서 별도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A호 군표는 1946년 7월 군정법령 제95호에 의해 시중에서의 유통이 정지되어 실제 한국에서의 통용 기간은 짧았다. 이에 대해 1947년 3월 13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전, 군표를 준비해가지고 왔었으나 조선은행권의 재고가 예상외로 충분하여 조선은행권을 계속 유통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광복 직후 한국의 경제는 무리한 전시체제의 후유증으로 경제는 피폐해져 있었고, 물러가던 일본인이 철수 자금 마련 등을 위해 조선은행권을 마구 찍어내어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통용권을 유통시키는 것은 미군정으로서는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두 번째 면 오른쪽 상단의 군표는 A호 군표가 시중에서 유통이 정지된 후, 1946년 9월에 미군에서 처음으로 시리즈 번호(461번)를 붙여 발행한 1달러 군표이다. 이 군표는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등 당시 미군이 주둔하던 전 지역에 공통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새로 발행한 군표는 A호 군표와 달리 미군과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사람(군속)만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1946년 10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일반시민은 군표를 가지거나 쓰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음을 공보부에서 경고하는 기사가 남아있다. 이후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까지 군표를 발행하였는데, 현지에서는 군표를 미국 달러와 동등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암암리에 유통되기도 하여, 미군은 수시로 시리즈 번호를 바꾸어 발행하고 기존 군표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말 없는 시대의 기록

「사진 11」조선은행 발행 1원 지폐(개권) 「사진 12」조선은행 발행 5원 지폐(갑권)
「사진 13」조선은행 발행 100원 지폐(병권) 「사진 14」조선은행 발행 100원 지폐(정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첫 번째 면에서 앞서 말한 50전 지폐를 제외한 나머지 지폐들이 바로 조선은행권이다. 조선은행권은 편의상 발행한 순서에 따라 금권(金券), 개권(改券), 그리고 갑, 을, 병, 정, 무권까지 구별하는데 1원(개권)과 5원(갑권)은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지폐이고 100원(병권)은 광복 이후인 1945년 12월부터 발행한 지폐이다. 지폐의 주요 도안으로는 특정 인물이 아닌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수노인상(壽老人像)이 사용되었다.

100원 지폐는 일제강점기 때 발행한 지폐와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100원 지폐가 일본에서 제조되어 반입된 것과 연관이 있다. 우측 상단에는 조선총독부의 문양으로 쓰였고 지금도 일본 정부의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는 오동 문양이 도안되었으며, 하단에는 ‘대일본제국인쇄국제조’라고 인쇄처가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1946년 7월 발행한 100원(정권)에는 인쇄처를 조선서적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문양은 무궁화로 바꾸게 된다.

사무엘 로씨는 광복 직후 약 1년 가까이 인천에 근무하면서 접하게 된 다양한 화폐들을 고스란히 앨범에 붙여 놓았다. 앨범에 붙여진 지폐들은 조선은행권을 비롯하여 군국주의의 상징이 담겨 있는 일본 지폐, 영어로 표기된 낯선 미국 군표 등 여러 종류의 지폐들이 뒤섞여 사용되었던 광복 직후의 어수선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사무엘 로씨가 직접 남긴 기록은 없지만, 지폐는 앨범 한 켠에서 그가 보고 겪었던 변화하는 한 시대의 기록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송완식(宋完植, Song Wan-shik)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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