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이 무기일 수도, 독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2013년 서울연극제에서 한 수상자의 소감이 강한 인상으로 뇌리에 스쳤었다. 바로 전윤환 연출가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인의 꿈을 꾸었지만 녹록치만은 않은 연극계의 현실은 당시 젊은 나이였던 그를 단단히 만든 계기가 된 것 같았다. 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던 주말 오전, 짖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작했던 인터뷰에서 그의 무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젊은 나이에 극단 <앤드씨어터>를 창단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앤드씨어터는 2008년도에 창단했는데, 당시 제가 대학교 3학년이었어요.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주변 선배들이 졸업 후 좋은 극단에 입단하지만, 배우로 무대에 오르기가 어렵더라고요. 무대에 오르는 그 시간 동안 많은 선배가 다른 일로 전향하거나 어렵사리 연극을 포기하는 모습을 흔히 보기도 하고요. 극단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대학교 3학년 때 지속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위해서 극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동문과 함께 사업자등록을 냈어요. 그때부터 일 년에 한 번씩 대학로 소극장을 대관해서 공연을 했어요.
서울 대학로에서 극단 연출뿐만 아니라 ‘혜화동 1번지’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계시는데. 인천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가 있는가요?
인천에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은 막연히 가지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학과를 가야겠다는 꿈을 꿨던 곳이 바로 인천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고향에 가서 작업을 진행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2013년에 ‘인천아트플랫폼 초이스’에 <미래도둑> 작품이 선정되면서 인천에서 공연할 첫 기회가 생겼었죠. 때마침 그 작품이 서울연극제 ‘미래아 솟아라’에서 연출상을 받았는데 저한테는 의미있는 작품을 인천에서도 선보일 수 있었어 뜻깊었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 공연의 출발점으로 인천을 본거지로 두면서 활동한 것 같아요.
인천아트플랫폼의 어떤 부분이 그곳에서 작업하고 싶은 마음을 생기게 했나요?
아무래도 공연장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어요. 블랙박스씨어터였던 공간이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서 충분히 변형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창고를 개조한 공연장이라서 층고도 높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이색적이고요. 인천에서 첫공연을 한 후에는 2015년부터 인천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3년 동안 시작하게 되었죠.
인천으로 오신 후, 과거와 비교할 때 작품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나요.
지역에 대한 생각을 앞서 말씀드렸던 <미래도둑> 작품을 하면서 시작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공연할 때 매진사례를 이뤘던 작품이 인천에서는 4,5명의 관객만 오니까 배우들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 이후로 인천에서는 관객을 어떤 작품으로 만나야할지를 다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었어요. 서울에서는 작업할 때는 주로 하고 싶은 실험을 했다면 인천에서는 기획의 측면을 더 강하게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2013년 이후로 2년 동안에는 연구가, 예술가, 지역주민, 문화 활동가들과 인천에 대해 리서치를 했고 그 결과, <터무늬있는연극 X 인천>공연을 두 차례나 진행했죠.
<터무늬있는연극X 인천>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터무늬있는연극X인천>은 손에도 지문이 있듯이 땅에도 지문이 있다는 생각에 착안해서 기획했어요. 여러 아티스트들이 영감을 받은 장소에서 장소가 지닌 역사성과 고유한 무늬를 바탕으로 공연을 만드는 작업이죠. 2015년도에 인천시가 관광도시로서 부상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인천시가 갖고 있는 고유한 무늬가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관광버스를 타고 4곳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진행했었죠. 2017년도에는 인천역을 향하는 지하철 1호선에서 40명의 관객들과 새로운 형식으로 작업을 해보았어요.
“저는 항상 이 전철을 타요. 1호선 전철을. 그래서 이 전철타고 (잠실에서) 엔드씨어터 연습실이 있는 인천역으로 가요. 제가 출근 할 때 사람들은 서울로 출근을 타고, 제가 퇴근할 때는 인천 사람들은 인천으로 돌아와요. 마치, 밀물이 갈 때 썰물이 오는 것처럼. 근데 더 재밌는 것은 인천역 개찰구가 맨 앞에 있었어 종착지에 도착할 때에 사람들이 맨 앞으로 몰려와요. 한번은 사람들이 앞으로 오는데, 괜히 거꾸로 가고 싶어서 마지막 칸 까지 가본 적이 있어요. 다같이 일어나서 마지막 칸으로 가보실까요?” – <터무늬있는연극X인천>에서 사용된 배우의 음성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인천 관객들이 많이 좋아하셨어요. 본인이 익숙한 장소를 걷고, 그 장소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알았던 이야기가 나오면 더 반갑게 느껴지고요. 사실은 <터무늬있는연극 X 인천>은 관객과 퍼포머(performer)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요. 관객들이 직접 장소를 찾아가는 모습은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면에서 관객은 퍼포머가 되기도 하는데 마치 어렸을 때 보물찾기를 하듯이 그러한 경험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올해 <터무늬있는연극>을 부평으로 선정한 이유가 있나요?
아트플랫폼 레지던시에서 3년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고 싶었어요. 아트플랫폼 극장과 중구의 관객들을 중심으로 만나다 보니깐 다른 환경에 놓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게다가 장편 연극을 선보이고 싶었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번 공연장상주단체를 신청하면서 1년 동안 래퍼토리를 공연할 수 있게 되었죠.
젊은 지역 기획자를 많이 배출하는 상황에서 지역 기획자가 가장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무엇일까요?
사실 자기가 속해있는 곳이 지역이기 때문에 활동하는 모두가 지역기획자라고 생각해요.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기획을 통해 과연 어떤 분을 만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죠. 연극 할 때는 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방법론에 중점을 두어 작업 했다면, 인천에서 기획할 때는 내 작업이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2018년 7월 6일에 부평센터에서 <도처의 햄릿>을 공연하십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4주년이 된 시점에서 인천 지역민들에게 <도처의 햄릿>을 선보이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혜화동 1번지’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해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연극제를 계속하고 있어요. 그중 <도처의 햄릿>이 세월호 연극제에 출품했던 작품 중 하나에요. <도처의 햄릿>은 세월호 사건이 한해가 지난 2015년부터 공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왜 인천은 세월호의 당사자성을 안 가지는지 대한 의문이었어요. 인천에서 떠난 배인데 왜 인천에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는지 궁금했었죠. 때마침 올해 신재훈 연출가께서 세월호 연극제 출품작으로 공연했던 <비온래 라이브>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공연했었어요. 그래서 그 작업의 연장선상으로 저희 팀도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고전 <햄릿>에 ‘도처’라는 단어가 붙었는데, 원작을 어떻게 각색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배우들에게 세월호 사건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고백의 과정이었어요. 세월호 연극을 1년에 한편씩 하는 배우도 연극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과연 내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할 수 있는지에 확신이 서지 않았죠. 단원들도 세월호 연극마저 어떤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는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더라고요. 그래서 세월호 사건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했고, 결국 ‘나의 일상의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협의를 했죠. 누구는 미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는 예술가로서 검열당했던 이야기를 고백하죠. 이런 일상의 참사를 고백하며 햄릿이 다르게 보이는 지점을 골랐고, 그 장면을 재현하는 형식으로 기획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참사가 한 곳이 아닌 도처 곳곳에 있을 수 있어 ‘도처’라는 말을 앞에 붙였죠.
각색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많은 얘기가 오갔을 것 같습니다.
저희 팀은 몇 년간 뉴 다큐멘터리 연극을 하고 있어요. 어떤 배역으로 무대에 서기보다는, 전윤환이라면 전윤환 자체로 무대 위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자신의 가장 사적이고도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거예요. 이번 <도처의 햄릿> 작업은 자신의 상황을 재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죠.
<햄릿>의 명대사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가 <도처의 햄릿>에서는 어떤 의미로 해석되었나요?
‘To be or not to be’가 ‘이대로냐 이대로가 아니냐로’도 해석할 수 있더라고요. 내가 일상에서 겪은 참사들이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인 상황에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혹은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관객이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주시길 바라는가요.
본인의 일상 참사에 대해서 한번 감각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글|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김규환
사진 제공| 앤드씨어터 서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