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품의 기억”_극단 나무 <이야기 하루>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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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1일 극단 나무의 <이야기 하루> 공연을 봤다. 극단 나무는 지난 호 인터뷰에서 소개했던 어린이 연극을 전문으로하고 있는 서구문화회관의 상주예술단체이다(인천문화통신3.0, 26호, 페이지 바로가기▶). 연극을 관람하던 중 아이러니하게도 발터 벤야민의 글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잘 알려진 벤야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 불운한 사상가였다. 정치경제학자와 문화이론가들은 오늘날의 상황이 벤야민이 살았던 그 우울한 시대와 몹시 유사하다고 말한다. 벤야민의 글과 <이야기 하루>가 완전히 겹쳐보였다.

어머니는 내가 무언가 깨뜨리거나 넘어지면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서투른 양반이 안부 전하란다.”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고 있던 꼽추 난쟁이를 이야기하신 것이다. (…) 그가 나타나면 나는 헛수고를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원은 작은 정원이 되고, 벤치는 작은 벤치가 되고, 방은 작은 방이 되면서 이윽고 모든 사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헛수고를 했다. 모든 사물은 오그라들었다. (…) 사람들은 임종을 앞둔 사람의 눈에는 ‘전 생애’가 스쳐 지나간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바로 꼽추 난쟁이가 우리들 모두에 대해서 간직하고 있는 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 이제 그는 그의 일을 마쳤다. 그러나 가스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처럼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시대의 문턱을 넘어 내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사랑하는 아이야, 아, 부탁이다. /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윤미애 역, 도서출판 길, 2007, p.151)

<이야기 하루>는 폐품을 주워 파는 ‘하루 할아버지’의 인생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회상이나 추억 같은 것이 아니다. 지난 호에서 기태인 대표가 말했듯 이 추적에 사용되는 것은 ‘주마등’이란 장치다. 주마등은 회상이나 추억과는 질적으로 다른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인식 가능한 순간에 붙잡지 않으면 섬광처럼 “휙” 스쳐 지나가버리는 이미지를 강조하곤 했다. 무엇보다 극에서 하루 할아버지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재현하는 작은 종이 인형에 ‘빙의’되었으며, 그 인형들과 뛰어 놀았고, 그 인형들의 마술쇼를 구경했다. 그렇다면 이 삶은, 이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벤야민이 말하는 꼽추 난쟁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폐품으로 만들어진 인형, 장롱, 책꽂이, 냉장고의 기억이다. 다시 말해, ‘폐품의 기억’이다. 그리고 이 폐품들은 2006년 맨몸으로 인천에 내려온 “자신감과 용기밖에 없는 젊은 배우”가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폐품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야기 하루>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역사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여졌던 한국전쟁과 지독한 노동착취로 얼룩진 산업화 시기다. 각 시기와 사건들 속에서 폐품들은 하루 할아버지가 숨는 전쟁 속 참호가 되기도 하고, 그를 채플린으로 만드는 기계장치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폐품들은 그것 이상을 하지 않는다. 어줍지 않은 이념적 훈육을 강요하거나, 발전주의로 인한 풍요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각각의 폐품들은 화약이 되어야 했고, 동시에 그 화약에 의해 불타야만 했던 자신의 삶을, 그리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조립되어, 그 다음 조립될 것을 위해 쓰레기로 전락해야만 했던 자신의 삶을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품들은 자신의 삶을 보여주면서, 그 삶을 함께 살아온 하루 할아버지의 두려움과 피로를 설명한다. 만약 새로운 상품이 여전히 폐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전쟁의 참상과 노동의 착취 역시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하루>가 이러한 의도를 밀고 나가고자 했다고 단정 지을 순 없는 노릇이다. 지금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상품의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해버렸다는, 우리에겐 이미 너무나 익숙해진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상황을 가격표에 매달려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어리숙한 갑부들에 대한 조롱거리로만 사용할 필요는 없다. 풍자는 부정만을 반복한다. 상품의 사용가치가 사라지면서, 거기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소망과 불안 같은 것이 달라붙게 되었다. 기태인 대표가 말했던 “재활용품이 갖고 있는 영혼”같은 것 말이다. 예컨대, “폭격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하늘을 나는 인간에게서 기대했던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가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산정에서 눈을 찾은 다음 도시로 가져와 한여름의 열기로 찌는 듯한 거리의 도로 위에 뿌리기 위해서였다.’”(피에르-막심 쉴, <기계주의와 철학>, 1938, p.95; 발터 벤야민,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 새물결, 2008, p.125 재인용) 상품은 공장에서 새롭게 생산되는 것에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폐품이 되어 그 소망과 불안만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것들은 깨워지길 기다리며 잠들어있다. 

극단 나무의 몸짓은 그 소망과 불안들을 깨우는 주술처럼 보인다. <이야기 하루>는 하루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제의이지만, 거기서 폐품으로 만들어진 인형, 장롱, 책꽂이, 냉장고는 다시 기지개를 켠다. “사랑하는 아이야, 아, 부탁이다. /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이제 폐품들은 다시 깨어나 로봇이 되어 아스팔트 거리 위를 걷고(<폐품 로봇>), 벨로시랩터가 되어 도시라는 정글 속을 뛰어다닐 것이다(<신문지 주라기>).  

 

글, 사진/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박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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