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범진용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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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로부터 와서는 서서히 팽창해 나가다 이내 의식을 덮어버리는 움직임 때문에 자면서 꾸는 꿈을 어떤 신호라고 여긴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내게 지속적으로 보내오는 신호 말이다. 《조용한 방》(대안공간 듬, 2017. 04. 01. – 04. 29.)에 전시된 범진용의 회화 작업들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상상적으로 감지했던 것은, 꼭 작가 자신이 아니어도 좋을 가상의 수신자, 송신된 감각들을 온전히 체험하리라고 상정된 환상 속에 실재(real)하는 누군가의 자리였다. 그의 그림들 앞에 서면 우리는 짧게 나마 그 수신인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와 함께 꿈 신호의 윤곽을 따라 그릴 수 있게 된다. 

전시명과 동명의 작품인 <조용한 방>을 포함한 범진용의 많은 회화 작업들이 큰 사이즈의 캔버스 위에 그려지기 때문에 화면 가까이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무대 배경과 같은 그림 속 공간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눈앞에 놓인 대상에 의해 직접 촉발된 감각을 인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꿈꾸고 있는 주체의 기억에 모호하게 남아 떠도는, 출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감각을 메타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 그의 그림을 봄으로써 우리는 순간이나마 그 불투명한 꿈의 얼개를 체험할 수 있으며 마치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인 지위가 감상을 매개로 변화하는 듯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자신이 직접 꿈을 꾸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눈 앞에 놓인 꿈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성취하고 있다는 그런 감각 덕분에 이번 전시를 <존 말코비치 되기> 의 수면 버전, 즉 ‘(잠자는) 범진용 되기’라고도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정보 없이 이번에 전시된 네 작품들만 보았을 때 그것들이 꿈에 관한 작업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기는 사실상 쉽지 않다. 《조용한 방》이 대안공간 듬의 2017년 기획 시리즈 <꿈, 판>의 일환으로 열리는 전시라는 점, 범진용이 <꿈 일기 드로잉>(2012) 등과 같이 꿈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전부터 해왔다는 점, 그리고 작가 스스로 그 작업들이 꿈에 관한 것임을 표명했다는 점 이외에 전시된 작품에서 ‘작가 자신의 꿈’이라는 어떤 상태를 명시적이거나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적인 요소를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이미지를 의식적인 상태에서 목격되거나 상상되고 조합된 여타의 이미지들부터 구분하도록 해주는 어떤 본질적인 요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애초에 꿈과 현실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기실, 현실에서 인식한 것들은 종종 변형된 맥락으로 꿈속에 등장하기도 하며 꿈에서 겪은 경험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현실의 사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리고 잠에서 깬 우리가 꿈에서 본 것들을 기억에서 소환해 내는 과정 중에 참고하게 되는 것 또한 현실에 실제(actual)하는 대상들이다.

한편, 꿈을 꾸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각을 일정 정도 차단해야 하는 것처럼 그의 그림 속 인물 형상들은 대체로 눈, 코, 입과 같은 신체 기관이 없거나 흐려져 있어 식별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미 꿈속에 있는 작가 자신의 감각의 대상이거나 현시이다. 예를 들어 <run>(2014)의 화면 한 가운데에 있는 ‘기어가면서 달리는 듯한’ 인물 형상은 두 팔과 다리 일부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흘러내리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일 뿐인데, 이는 꿈을 꾸고 있었던 작가 자신의 감각과 심적 상태를 표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업실>(2013)에 등장하는 유일한 한 사람은 목과 얼굴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조용한 방>(2014)에서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얼굴은 없으며, 대신 잘린 혀나 잇몸과 치아, 엿보는 듯한 눈알이 검고 작은 동그라미 안에 각각 분리되어 화면 위를 떠다닌다. 이렇게 불명확하거나 분절된 방식으로 신체 기관이 묘사되는 까닭은, 먼저 꿈의 광경들이 주로 꿈을 꾸는 이의 1인칭 시점으로 수렴되고 경험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여타의 도구 없이는 누구라도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꿈속에서는 작가 자신의 얼굴이나 스스로 행한 행위들을 굳이 구체적이거나 통합된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꿈에 등장하는 사건 속에서 어떤 인물이 특별한 개별자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지 못한 경우 사건의 전개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세부 묘사는 종종 생략되곤 했을 것이다.

그의 그림들 속에서 인체 형상들이 단순화되는 것과는 달리 공간의 구성, 형태와 질감의 표현 방식은 한 작업 안에서도 꽤 다양하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회화 작업인 <작업실>을 보자. 천장과 벽을 구분하는 선의 위치가 같고 석고 조각상이 두 캔버스의 중앙에 절반씩 걸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두 화면 속 공간들이 서로 이어져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천장 가까이에 있는 흰 벽은 캔버스들 간의 물리적 경계면을 기준으로 끝이 나 있으며 바닥 타일의 크기나 빛이 떨어지는 방향도 두 캔버스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표현방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대여섯 가지 묽고 옅은 색의 물감으로 층을 만들어 한 필 한 필 촘촘히 그려 나간 벽면과 묘사된 장면 전체가 허물어 지는 듯 흘러내리는 물감,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거친 붓질의 그림 속 그림이 하나의 작품 안에 모두 들어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run>에서는 이집트 미술의 정면성의 원리를 따르며 그려진 한 손과 얼굴, 그리고 인상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반짝이는 수면이 함께 한 화면 위에 있다. 형상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용한 방> 속 말과 인간의 이종결합된 형태에 주목해볼 만하다. 여러 차원이 서로 엉켜서 뒤틀려 있으며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혼종된 방식으로 자기 주변의 세계가 현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들은 이렇듯 우리가 꿈의 문턱을 넘는 순간 만나게 되는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은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 안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run>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의 경계 주위로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물감이 조금 번져 있다. 전시 공간의 네 벽면을 하나씩 점유하고 있는 각각의 작업 속 인물형상들은 캔버스 경계를 가로 질러 한 방향으로 서로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이 전시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가장 크며 가장 긴 기간 동안 제작된 <조용한 방>을 살펴보자. 이 작업의 대략 위에서 사분의 일 지점에 지평선이 놓여있고 왼편엔 불, 오른편엔 전투경찰의 행렬이 교차하는 사선 구도로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림 중앙에 소실점이 있는 풍경처럼 시각적 중심이 가운데로 모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찬찬히 보다 보면 전투경찰들의 움직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추락직전에 놓인 배, 또 그 배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솟아오른 말의 두상, 그 옆으로 잠시 낮아지다 다시 높아지는 기울기의 구름 등을 통해 이 그림 속에 참으로 역동적인 시각적 흐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견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미지와 서사들의 비약적 연결도 무언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 움직임의 감각에 한몫을 한다.

이토록 격동적인 움직임 속에 있는 침몰 직전의 배, 번지는 불, 불 가까이 모인 사람들, 불 옆의 물, 일군의 전투경찰이라는 기표와 2014년이라는 제작연도를 통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사건은 너무도 분명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는 아버지가 죽은 아들의 관을 지키면서 꾼 꿈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젝은 라캉의 이론을 설명할 때 이 일화를 언급하며 “현실 자체가 자신의 꿈을 (꿈속에서 드러나는 실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논지를 따르자면 <조용한 방>은 잠재된 진실을 촉발하려는 것, 곧 외상적 실재를 드러내려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그 진실과의 대면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잠자는) 범진용 되기’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기술은 바로, 꿈속에 내재된 이 반동적인 신호들을 기꺼이 수신하고도 재빨리 (안전하고 조용한) 현실로 도망치지 않는 것, 그리고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 속에서도 미묘하게 진행중인 이행의 방향을 예민하게 살피고 읽어내는 것이다.

(run, 45.5x53cm, oil on canvas, 2014)
(run, 91x117cm, oil on canvas, 2014)
(작업실, workroom, 117×182, oil on canvas, 2013)
(조용한 방, room of silence, 163x390cm, oil on canva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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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말코비치 되기>는 1999년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우연히 캐비닛을 옮기다 존 말코비치의 뇌로 가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 크레이그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통로를 따라 가면 사람들은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면서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을 15분 동안 느낄 수 있다.
[2]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옮김,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2007, 89-91쪽

글/ 손송이 비술비평, 인천아트플랫폼 8기 입주 연구자, 1인출판사 ‘뜬구름’ 운영
사진/ 대안공간 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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