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영혼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최윤미 재즈피아니스트 (한국 New York Art Production(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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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터뷰: 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재즈의 영혼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최윤미 재즈피아니스트 (한국 New York Art Production(주) 대표)

장지혜 (인천일보 기자)

최윤미 프로필

현, 한국 New York Art Production(주) 대표

현, 한국 미래재즈협회 회장

현, 미국 Velcanto Opera Inc. Jazz Department 음악 감독

현, 뉴욕 Girl behind the curtain Production Musical 음악감독

전, 그래미어워드 보컬리스트 Concha Buika 음악감독

전, 뉴욕 Aaron Theatre Production 음악감독

숙명여대 학사

Prince Claus Conservatory 학사

Queens College 석사

인천문화재단 시민문화협의회 의원

네덜란드 2014 Leiden International Jazz award 1위

이탈리아 2017년 국제 Virtual Jazz 콩쿨 4위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 한쪽에 정열의 코르사주를 단 그녀. 최윤미 재즈 피아니스트의 화려하면서도 묵직한 연주가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마치 한순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듯 빈틈없는 주법이 여백을 채운다. 3살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최윤미는 인천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했다. 클래식 피아노 신동이었던 그가 어떻게 지금은 재즈 피아니스트로 세계 유명 무대를 휩쓸게 됐을까. 얼마 전 미국에서 귀국해 지금은 인천 청라에 거주하고 있는 그를 만나 그동안의 예술 여정을 들어봤다.

처음엔 엄마가 시켜서, 지금은 내 인생 그 자체

“엄마가 어느 날 피아노와 관련된 꿈을 꿨대요. 그때부터 ‘윤미야 너 피아노 해야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냥 그렇게 모든 게 시작됐죠.”

최 씨에게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뭣도 모르고 출발한 피아노이지만 그에게 소질이 있었다. 좋은 성적으로 인천예고와 숙명여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 뒤 그에게 혼돈이 찾아왔다.

“졸업하고 나니 ‘잘 될 거야’라는 엄마의 격려가 ‘이제 돈 벌어야지’라는 쪽으로 바뀌더군요. 피아노로 어떻게 돈을 버나 생각하다가 피아노 학원 강사를 알아봤는데 20년 전 당시 일주일에 나흘 일하고 받는 월급이 70만원이었어요. 너무 적었죠.”

최윤미 재즈 피아니스트
(사진: 장지혜 기자)

연주회에서의 모습
(사진: 최윤미 제공)

클래식밖에 몰랐던 그녀가 실용음악에 발을 들인 건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할 때였다. “드럼이나 기타를 치는 다른 분들이 나와 리듬이 다르더라고요. 그 리듬을 알려고 실용음악을 배웠어요.”

실용음악 학원에서 재즈 기법을 알게 되면서 최 씨는 재즈의 자유로움에 매료됐다. 언제나 다양했고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음악이었다.

“클래식은요 하나라도 틀리면 전체가 오류인 거에요. 하지만 재즈는 다르죠. 코드 안에서라면 자유로워요. 틀린 음으로 변형할 수 있고 순발력을 발휘하면 틀린 게 아니라 다채로운 거거든요.”

재즈를 만난 그의 연주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커진 스펙트럼 안에서 그 역시 자유자재로 유영했다.

세계적 재즈 아티스트의 탄생

그는 어느 날 네덜란드로 떠났다. 더 넓을 가능성,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자 유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네덜란드 음악 학교에서 더 깊이 있는 재즈 피아노를 공부했죠.”

2학년이 되던 해 그는 자칫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을 한다. 창작곡으로 데모를 만들어 유럽 전역의 재즈 페스티벌 관계자를 찾아 이메일을 일일이 보낸 것이다.

“웹사이트에서 프로그래머 메일 주소를 검색하고 데모를 보냈죠. 100개였어요. 그 개수가.”

100명 중 90명은 메일 자체를 읽지 않았다. 10명이 읽었고 그중 2명이 답장을 보내 연주해 달라고 했다. 단 2건을 시작으로 조금씩 관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많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까 두려웠어요. 적극적으로 나를 알리니 제 열정과 실력을 알아주는 곳이 생겼죠.”

이 모든 게 네덜란드 학교 재학 중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최 씨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석사 과정을 밟는다.

이후 최윤미 트리오를 결성한 그는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러시아 한국, 미국, 이탈리아에서 300회 이상 활발한 연주를 하는 명실공히 세계적 재즈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

2014년엔 ‘Netherlands Leiden’ 국제 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인천 Wave Jazz 페스티벌, 울산 재즈페스티벌, 북촌 음악 축제, 춘천 아트페스티벌 등에 초청받아 음악적인 발판을 넓혔다.

“미국에서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발탁된 것은 저의 음악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어요.”

2015년 미국 ‘타임스퀘어 Swing 46’에서 진행하는 ‘Girl Behind the Curtian’ 프로듀서와 브로드웨이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발탁되는 성과가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드문 사례일 뿐 아니라 아무런 연고나 발판이 없던 그가 스스로 일궈낸 결실이었다.

이후 2019년 그래미 어워드 보컬리스트 ‘Concha Buika’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감독으로 선정되며 카네기홀, ‘New Port Jazz festival’, ‘Red Sea Jazz festival’, ‘NYC Summer stage’, ‘SF Jazz center’, ‘Coliseu Theater’ 등 세계 유명 음악 공연장과 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하는 등으로 국제적 활약을 하고 있다.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모습
(사진: 최윤미 제공)

뉴욕 섬머 스테이지에서
(사진: 최윤미 제공)

아무도 못 말리는 예술혼

‘신들린 듯 고풍스러운 연주.’ 최윤미의 재즈 연주는 흔히 이렇게 평가된다.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면 오로지 본인과 음악만 존재한다는 그가 가장 아끼는 무대는 관객 50명 안팎의 작은 무대다.

“관객들의 표정이나 움직이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보이거든요. 그들과 호흡하며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몰두하다 보면 관객들도 어느새 저와 같은 세상에 들어와 있죠.”

작곡도 하는 그는 여행하거나 예술 작품을 보면서 영감을 얻는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 음악가들의 곡을 들으면 머릿속도 활발해지죠. 여러 악기가 가상의 공간에서 합주하며 악상이 떠올라요. 그게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피아노에 앉아서 곡으로 옮기는 것이죠.”

2021년에 발매한 ‘7 days’ 정규 앨범은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 “어떻게 인간이 저런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감동하며 곡을 쓰기 시작했고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7일을 가지고 7개의 곡을 만들 수 있었어요.”

재즈의 영혼 시민들과 공유했으면

한국에 들어와 그는 서울에 뉴욕아트프로덕션이라는 기획사를 차렸다. 여러 뮤지션과 공연을 기획하고 그가 리더로 있는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장르도 왈츠, 가곡, 클래식, 재즈로 여러 가지다. 솔로로 혹은 그룹으로 그는 서울과 인천, 전국을 오가며 종횡무진 한다. 특히 재즈의 일상화를 위해 앞장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재즈가 원래 미국의 금주령 시절부터 시작해 자유를 갈구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장르였죠. 하지만 점점 어렵고 복잡한 방식으로 바뀌더니 우리나라에 특히 쉽지 않은 형식으로 알려졌어요.”

최 씨는 쉬운 재즈, 누구나 노래하는 재즈를 주창한다. 바로 기본 스윙재즈다.

“인천 청라에서 스윙 댄스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반나절 누구나 스윙재즈를 익히고 어둑해질 무렵에 모두 나와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죠.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인천에서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최 씨의 꿈이 인천에서 오롯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글 장지혜 (인천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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