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권번 출신 가수 장일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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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인천 미두장(米豆場)이 번창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외지인들이 모여든다. 그에 따라 인천 땅에 외식업과 여관업, 그리고 유흥업이 생겨나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런 인천 사회의 모습 중에 기생조합이었던 권번(券番)이 등장한다. 고 신태범(申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인천권번 기생 명단 초일기(草日記)가 등장하는데 기생 중에 장일타홍(張一朶紅)의 이름이 보인다. 그녀의 전직이 인천권번 기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935년 8월호 잡지『삼천리』의 기사에도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컬럼비아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라고 쓰고 있다.

장일타홍은 당시 우리나라 톱클래스 가수 중의 한 명이었다. 여러 신문에 그녀의 활발한 활동상이 기사화되어 있다. 그러나 1940년 3월 “방송예술가 실연(實演)의 밤” 출연 이후 돌연 종적을 감추고 만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은퇴로 이어진 것인지, 그녀의 동정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장일타홍의 출생 기록이나 가계(家系), 결혼 생활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 지금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34년 9월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린 삼남지방 수재민 위문 ‘전조선 순례 음악회’ 참가자 프로필에 일타홍이 ‘애초 인천의 한 부요한 가정 출신이었는데 돌연한 부친의 병사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급기야 기적(妓籍)에 몸을 두게 된 애화의 주인공’으로 기술하고 있다. 데뷔는 경성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영예의 1등을 차지하면서 이루어졌다.

오늘날까지 장일타홍의 노래로 확인된 곡은 1934~5년에 콜롬비아에서 취입한 20곡으로 음반 10장 분량이다. 특기할 것은 그녀가 부른 노래가 ‘신민요곡’을 빼고는 대부분이 경기민요였다. 그녀의 출생지, 성장지가 인천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타홍(一朶紅)! 이름과 같이 그녀는 한 송이 붉은 꽃으로서 웃음을 파는 신세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가요사를 장식한 인천 인물로 우뚝 선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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