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 연극 〈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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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수수께끼 얼굴을 하고서연극 <유원>

엄현희(연극평론가)

<유원>(원작_백온유, 각색_신재훈, 연출_전윤환)이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공연되었다. 연극은 2019년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유원』을 각색했다. 이 작품은 극단 앤드씨어터가 상주단체로 있는 인천서구문화회관의 지원을 받아 함께 만든 청소년 이야기 극으로, 지역 예술 공간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예술단체에서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며 콘텐츠를 확장한 것이다. 앤드씨어터는 이전에도 소설 『아몬드』(원작_손원평)를 낭독공연으로 만들어 2018, 2019년에 공연했다.

연극 <유원>,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 2021.10.8.~10.10.
주최주관: 앤드씨어터, 인천서구문화재단 ⓒ앤드씨어터

연극 <유원>은 청소년을 주요 관객으로 하는 청소년극이란 명칭을 굳이 내세우지 않는다. 작품 자체도 청소년극의 주요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왕따 문제, 성적 스트레스, 연애 상담, 학교 폭력 등의 학교생활이 주가 아니다. 그보다 <유원>은 주인공 열여덟 유원의 심리를 따라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과 마주하며 소녀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소녀는 자라난다. 소녀는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소설 원작은 유려한 각색을 따라 편안하게 무대로 안착한다.

연극을 관람하며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은 주황빛 노을로 다가왔다. 작품은 특히 저 너머 주황색 조명을 배경으로 주인공 소녀와 그녀의 친구가 옥상에서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소녀들 혹은 주인공 유원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저 아래, 사람들의 느릿하며 평온한 몸짓일까? 그러나 유원에게 그 색은 그렇게 간단한 색이 아닐 수도 있다. 유원에게 선명한 주황색은 붉은색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유원 언니를 죽게 하고 유원을 살린, 다시 태어나게 만든 불길한 화재 불꽃과 닮은 색 말이다. 실제로 작품은 유원이 화재를 떠올릴 때마다 극장 뒷벽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 역시 반복해서 보여준다. 유원은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불우한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불안하게 떠올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이 삶의 무게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

ⓒ앤드씨어터

<유원>은 자신이 의도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소녀 이야기다. 창작진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재난을 상기시키며, 재난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라 말한다(공연 소개 참조). 조용히 숨죽인 채 혹은 외면하거나 상처를 인정하며 함께 나아가는 갖가지 모습의 삶들. 경험은 도려내거나 떼어낼 수 없다. 다만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뿐. 따라서 연극은 유원과 유원 주변 그들 모두 삶 혹은 선택에 대해 섣부른 판단 대신에 잠자코 자리를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것 같다. 주인공 유원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입체적으로 살아 있는 점이 이 작품 미덕이다. 소설 원작도 다양한 군소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도 유리한 장점으로 드러난다. 서로 간의 호흡이 잘 맞는 배우들이 무대를 탄탄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앤드씨어터

작품이 공연된 인천서구문화회관 대공연장은 무대와 객석 간 거리가 꽤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배우들은 핀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작품이 동선이나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소극장 공간 운영을 떠올리게 할 때마다 초반에 다소 두드러져 보였다. 작은 공간에서 핀 마이크를 쓰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다양한 층의 높이를 활용하거나, 비교적 넓게 공간을 사용하거나 장면이 겹쳐지며 연출되는 식으로 시간이 흐르며 핀 마이크는 비교적 자연스러워졌다. 앞서 언급한 옥상 장면처럼 연극은 시야를 확장하며 공간을 넓게 쓰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 작은 방이나 아파트 실내에서 갑자기 확장되는 공간 미장센은 몇 개의 계단과 기다란 커튼 외 별다른 세트가 없었음에도 안정감 있고 자신감 있게 만들어지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창작진은 대극장 공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다.

작품을 관람하며 청소년 이야기 극이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점이 읽혔다.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그 시기를 관통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유원에게 스스로를 투영해 과거의 자아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특히 삶의 어느 면면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주인공 유원의 눈을 따라 만나게 되는 모습은 무엇일까.

ⓒ앤드씨어터

주인공 유원이 인간이란 각양각색 미로를 만나 헤매면서 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연극 <유원>은 점점 파고들수록 의미가 달라지며 색깔이 달라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한발씩 길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원은 갖가지 모습의 사람들과 부딪침 속에서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은인이지만 증오했던 아저씨와의 만남도 아저씨의 아이들을 통해 유원에게 구원으로 가는 길로 뒤바뀌며, 스스로를 희생하며 동생을 살린 언니의 그림자에 힘겨워하던 마음도 생명과 삶에 대한 기쁨으로 변화한다. 연극의 마지막 <유원> 무대를 감싸는 주황빛 석양이 처음과 다르게 여지없이 따뜻하게 보였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연극은 절망과 파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 수수께끼 같은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여전히 미로에 갇힌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안녕이라고 묻는 듯하다.

엄현희(嚴鉉熙, Um Hyun Hee)

연극평론가. 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과 『기록, 성장, 연극』(2018)을 펴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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