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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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

이병국(문학평론가)

강화길의 소설은 어떤 폭발을 예비하는 것처럼 읽힌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엄청난 사건이 인물들을 휘감을 것만 같은데 그 긴장의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서사는 부지불식간에 독자의 영역에 슬며시 옮겨져 있다. 이를 당혹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는 소설이 구축해 놓은 공간에 우리가 깊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소라 생각했던 그곳이 섬뜩하고 낯선 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안다. 강화길이 재현한 소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세계가 얼마나 위협적이며 폭력적인지를 알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세계를 만들고 굳건히 유지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데 있다. 최근작 『대불호텔의 유령』도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이전 소설과는 달리 닫힌 구조의 결말을 취하는데 이는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가 자신이 과거에 쓴 단편소설 「니꼴라 유치원」을 쓰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소설가 소설의 형식을 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재하지 않는 장소의 실재하는 유령에 관한 소설 쓰기는 이번 소설에서도 반복, 변주되며 분명한 결말로 나아간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문학동네, 2021.

이 소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및 3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전체 스토리는 소설가인 ‘나’가 몇 년 전 발표한 단편 「니꼴라 유치원」을 쓸 때 경험했던 일과 그 와중에 새롭게 알게 된 ‘대불호텔’과 관련된 사람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소설에서 1부와 3부의 화자는 작가인 ‘나’다. 1부에서 ‘나’는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할 때마다”(19쪽) ‘증오, 원한 미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의 기원이랄 수 있는 여섯 살 무렵의 경험(문용 옹주를 자처하는 이문용의 집과 관련된)과 그 소리를 잠시나마 잊게 한 대불호텔의 과거를 전해줄 박지운과의 만남이 여기에 담긴다.

2부는 박지운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69쪽)은 사건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인 지영현을 화자로 내세워 진행되며 3부는 2부에서 재현된 박지운의 이야기와는 다른 제3자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액자 내부 사건의 공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다. 1884년경 2층의 목조가옥으로 숙박업을 시작해 1888년 3층 벽돌 건물로 탈바꿈하여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1950년 중반으로 전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불호텔은 쇠락하여 ‘중화루’라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었으며 호텔은 3층에서 “귀신이 들러붙지 않고서야 저런 팔자는 없지”(97쪽)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고연주’에 의해 운영될 뿐이다. 이 호텔에 『힐 하우스의 유령』의 저자 셜리 잭슨이 묵게 되면서 사건이 진행된다.

1950년대 중화루 (사진: 인천광역시 중구청) 대불호텔 터에 복원한 대불호텔 전시관

이 소설의 중요 키워드는 장소에서 비롯된, 그러면서 인물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외부 세계, 즉 위태로운 삶을 초래한 세계의 불합리한 억압에 기반을 둔다.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화할 수 없는 전후 1950년대의 상황과 화교로 맥락화된 소수자의 안정적 삶이 허락되지 않는 정황 등이 맞물리면서 대불호텔은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장소로 의미화된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강한 생활력이며 ‘유령’으로 상징된 악의인 셈이다. 이는 이 소설의 초점화자인 작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어린 ‘나’가 이문용에게 매혹되는 이유는 이문용이 문용 옹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 비록 그녀가 ‘가짜’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발화하더라도 그것을 들어주는 존재가 부재한 상태가 ‘지나간 미래’로서 ‘나’의 거울쌍이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어쩌면 ‘악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악의’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귀신 들린 여자’ 고연주, 소설가로서의 자의식과 인정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는 셜리 잭슨,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을 자신의 존재 상태로 채택한 지영현에게, 더 나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리하는 박지운에게 ‘악의’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용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생존 방식인 셈이다.

그녀(들)은 악의에 기반을 둔 존재 내부의 충동에 의해 추동되는 행위를 수행한다. 그럼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그녀(들)은 자신이 풀어내는 이야기에서 구체적 장소를 점유하면서도 기묘하게 미끄러지면서 불편한 지위로 밀려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되는 그녀(들)은 대불호텔 내부와 조우하지 못한 채 외부에 의해 상상된 방식으로만 추상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나’에 의해 악의에 가득 찬 타자의 허울을 뒤집어쓴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욕망의 잔영,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는 어쩌면 전체 서사의 중심이 되는 2부가 박지운의 불확실한 기억, 아니 악의적 각색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녀(들) 삶의 구체성은 다른 이에 의해 구성될 뿐, 그 자신은 이미 죽은 존재로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박지운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과거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화자와 서술 주체에 의해 이중으로 구성된 존재로 그녀(들) 모두 타자의 상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 속 구성적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 낙차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자 하는 충동이며 악의가 전부이길 바라는 세계의 의지가 추동한 결과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 여성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서발턴의 발화에는 그 권리를 둘러싼 허용과 배제의 권력이 개입되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담화의 장이 이미 폭력적으로 중층 결정된 공간 속에서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자기주체성을 외주화할 수밖에 없는 이 유령의 모습은 소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재현되는 인물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지만 그런 세계로부터 제한되지 않으려는 수행성의 ‘유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1955년 대불호텔에서 죽은 여자는 스스로 주체화될 수 없는, 일종의 서발턴의 상징적 죽음임과 동시에 폭력적 세계 속에 그들을 가둬두려는 욕망의 실패담에 가깝다. “악의? 그까짓 것들.”(295쪽) 그렇다. 악의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에게 악의에 기대도록 만든 세계가 문제일 따름이다. 폭발 직전의 순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192쪽, 195쪽) 즉 언제든 무너질지 모르는 순간을 포착하는 강화길 작가에게 악의는 세계로부터 배제된 소수자의 생존 수단이었다. 믿을 수 없는 타자와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해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주어진 자기주체성이 그것인 셈이다. 그러니 세계 따위 언제든 무너져도 괜찮은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대불호텔의 유령』이 담고 있는 역사적 현실과 복합적인 사유를 풀어내기는 어렵기만 하다. 다만, “모든 것은 언제든 망가질 수 있다. 우리는 늘 그런 위협 속에 산다”(277쪽)는 사실, 그 절망적인 매혹을 수용케 한 것은 장화와 홍련 그리고 그들로 인해 죽게 된 다른 수령들의 마음을 들어준 수령의 마음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303쪽) 여성이라서, 되놈이라서 이 땅에 속할 수 없다고, 떠나라고 하는 패악을 감당해야 했던 그들에게 대불호텔 안에서나마 잠시라도 평화로운 순간을 제공하여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148쪽)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환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병국(李秉國, Lee Byungkook)

2013년 <동아일보>로 시,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등단.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2019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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