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학(漫畫學)의 독립선언: 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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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학(漫畫學)의 독립선언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전성원(황해문화 편집장)

한상정, 『만화학의 재구성』(이숲, 2021)

김현, 오규원, 김창남, 이재현…. 이 글을 읽는 분이라면 이들의 이름을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을 묻는다면 다소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김현은 『문학과 지성』을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문학평론가, 오규원은 수많은 후학을 길러낸 교육자이자 시인, 김창남은 문화연구 1세대 연구자이자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했고, 이재현은 노동문학과 민중문학 논쟁을 이끌었던 전위적인 문학평론가였다. 이들을 하나로 엮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한 시대를 풍미한 지성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만화’다. 이들은 만화를 읽었고,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그들의 본업은 아닐지라도 만화비평을 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문학평론가 김현과 시인 오규원이 ‘대중문화’로서의 만화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김현은 「만화도 예술인가」에서 만화도 예술이기에 평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만화 또한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가진 상징체계로서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글’과 합쳐진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기호론적인 의미를 지니며, 이는 문학작품에서 비유나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주장은 예술로서의 만화를 긍정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서 만화라는 예술이 처한 허약한 지위와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에 발표된 권구현의 「신문삽화 만평」을 만화비평의 효시로 꼽지만, 실제로 만화가 본격적인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 들어 만화는 대중이 즐기는 예술이자 문화, 무엇보다 대중문화산업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만화의 역사, 문화, 산업 등을 다룬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비평의 양적 팽창과 질적 상승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만화평론가협회와 한국만화학회가 결성되는 등 전문만화비평 집단이 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여전히 예술로서 그 입지가 약한 편이다. 그 이유는 만화의 특성과 고유성에 입각한 독자적인 만화비평이론이 정립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1대학에서 만화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인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만화연구자이자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상정은 『만화학의 재구성』을 통해 이른바 ‘만화학’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제1장 「만화연구의 시작점」을 비롯해 제12장 「만화읽기의 특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1장에서 제5장 「만화의 탄생」에서 만화라는 표현형식의 역사적 개념과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제6장 「만화의 특성」부터 제12장까지는 만화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만화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읽어낼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는 우선 ‘만화(漫畫)’라는 개념과 용어가 지닌 혼란스러움에 대해 지적한다. “만화는 일본어 ‘망가(漫画, まんが)’의 한국식 표현”으로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망가라는 용어가 ‘카툰, 코믹스, 애니메이션’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만큼 망가를 근원으로 삼은 한국과 중국의 만화도 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만화에 조응하는 영어 단어 ‘카툰’의 사용법도 마찬가지다.

만화학의 정립과 연구에서 개념 정의의 필요성과 의미는 무엇일까?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거나, 희곡을 연극으로 제작하거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등 형질전환(transformation)이 이루어질 때 그 명칭도 함께 변화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정지된 무동(無動)의 형식인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을 때조차 이를 그냥 망가, 만화로 호명하는 방식의 혼란스러움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에게도 『만화의 이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acCloud)의 정의, 만화는 “수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미학적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이란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재현의 일반화에 있어서 만화의 특수성을 분리해낼 수 없다. 한 근대적 매체를 몇 천 년 전통의 시각적 표현과 혼동”시킨다는 티에리 그로에스틴(Thierry Groensteen)의 비판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정의는 만화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포괄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경계의 불명확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근대’ 만화를 정의한다.

필자는 앞에서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탄생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고, 이것을 모두 갖춰야 만화에 대한 역사적 정의가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연쇄적 칸의 상호의존성을 지닐 것, 문자를 활용하는 이미지 서사일 것, 대중적 전파와 확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간지 규모의 인쇄물에 실릴 것, 말풍선을 가질 것,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근대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표현형식으로서의 만화다. 이는,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태어날 때까지의 오랜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방식이 정착될 때까지라는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본 것이다. (107쪽)

영화가 벤야민을 비롯한 동시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고, 적극적인 해석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달리 어째서 같은 시기에 탄생한 근대 만화는 동시대 지식인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을까? 한상정은 영화가 “카메라와 영사기라는 완전히 새로운 도구들, 움직임의 재현이라는 문화적 충격”을 준 것과 달리 만화는 “칸, 글, 그림, 말풍선, 종이 인쇄의 산물인 만화는 하등 새로운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해보면 만화가 지식인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그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일상 영역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으며, 어떤 기술 변화에도 조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표현형식이기 때문이다.

한상정은 “문학작품은 의미만이 아니라 문체도 중요하게 다루고, 영화작품도 이야기와 이야기가 전달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이나 배우의 연기를 다루는데, 만화작품도 만화 고유의 특성들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만화학의 정립과 새로운 출발을 위해 과거와 단호한 결별을 시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학의 재구성』은 만화연구·만화비평의 독립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그간 만화비평, 만화연구에서 일종의 ‘클리셰’처럼 반복되던 서술 — 예를 들어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이자 만화평론가이기도 한 프랑시스 라카생이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 불렀다는 것과 같은 동어반복, 만화의 기원을 라스코 동굴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던지 하는 등 — 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런 인식과 적극적 대결을 벌인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만화읽기(비평이나 분석)’가 “만화를 그림과 동일시하거나 만화분석을 스토리 분석과 동일시”하는 오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 『만화학의 재구성』이 달성한 성취와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다만, 만화학의 독립선언이 앞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개의 고비를 넘겨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이른바 ‘비평의 죽음’이다. 비평이 살기 위해선 우선 읽어낼 만한 작품이 생산되어야 하고, 그 비평을 진지하게 읽어줄 독자가 필요하다. 만화비평이 어려운 까닭은 단순히 독자적인 만화비평이론이 부족하거나 부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는 일찌감치 대중예술이자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었지만, 비평은 외면되었다. 물론, 오늘날 비평의 죽음은 문학, 건축, 연극 등 전통적인 예술 분야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근대에 탄생하여 애초부터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 사진, 만화 등에게는 더욱 가혹한 현실이다.

두 번째는 ‘근대(modern)’와 만화를 접목시켜 정의하려는 시도가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지닌 장점들, 장르적 포괄성과 유연성을 도리어 학문적으로 협소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다. “사진이나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표현형식은 어느 날 ‘뚝’하고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주 많은 다양한 시도 속에서 탄생은 우연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만화 역시 “탄생 이후 한편으로는 기존 예술의 재현형식을 빌려 쓰고, 다른 한편으로 서서히 자신만의 고유성을 확보”해 나갔다. 만화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고스란히 인정하더라도 ‘이미지를 통한 내러티브, 스토리텔링’의 역사라는 장대한 인류 서사의 한 축에서 라스코 동굴 벽화, 이집트 벽화, 중세 교회의 십자가의 길(14처) 성화, 불교의 사찰벽화 십우도(十牛圖), 역사를 담은 태피스트리 등 “몇 천 년의 전통을 지닌 그림과 문자의 공존을 통한 표현형식”은 만화의 역사에서 제외할 수 없는 근원적 뿌리이기도 하다. 만화가 지닌 고유한 특성 중 하나는 글쓰기와 더불어 창작과 소통의 진입장벽이 가장 낮은 분야라는 점에 있다. 저자는 「들어가며」에서 만화라는 “존재조차 희미했던 이 표현형식”이 “탄생 125주년을 맞은 2021년에도 여전히 건재”하며, “지구적 환란이라는 코로나 시대에도 그 조용하고 끈질긴 존재감”을 드러내며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앞으로도 만화가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다면 그 이유 또한 같을 것이다.

전성원(全盛源, Jeon Sung Won)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주요저서로 『길 위의 독서』,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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