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時空)을 넘어 한판으로 어우러지다<판소리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이한수(인성여자고등학교 교사)
6월 4일부터 한 달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학산소극장에서 <판소리 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공연이 진행되었다. 판소리 완창(完唱)은 전통 국악 분야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고 경지가 높은 연희 갈래라 소리꾼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작업이다. 소리꾼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판소리 완청(完聽)은 사설의 이해도 만만치 않고 공연 시간이 장장 6시간에 달해 참 고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춘향가 완청’은 청중들이 보다 수월하게 완창 공연을 듣고 즐길 수 있도록 전문가 해설을 덧붙여 4회에 걸쳐 진행함으로써 소리 듣는 이들이 귀명창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판소리인문학 춘향가 완청(完聽)>, 매주 금요일 총4회 공연, 인천학산소극장, 2021.6.4.~6.25. ⓒ사단법인 우리소리 |
사설이 어려워 깊이 빠져들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판소리는 미학적으로 다양한 미적 범주를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오페라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폭넓은 음정을 구사하여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흡입력을 갖고 있다. 막힘 없는 너털웃음과 함께 부조리를 꼬집어주는 풍자미, 비극적 긴장에 빠지게 하는 비장미, 위대한 정신에 고개 숙이게 하는 숭고미 등 다양한 아름다움이 극적으로 구성되며, 한(恨)이 서린 슬픔으로 애간장이 녹는 계면조(界面調)와 장엄한 풍모에 고개가 수그러드는 우조(羽調)의 음정에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이 어우러져 소리꾼과 청중이 하나가 되는 우리 전통 문화의 정수(精髓)를 맛볼 수 있었다. 특히 김경아 명창의 상성(고음)은 가늘지 않고 두툼하며 하성(저음) 또한 기묘하여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하다. 서양 성악은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로 음역을 나누어 각기 전공 영역을 나눠 맡는데 판소리 소리꾼은 이 모든 음역을 혼자 다 감당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춘향가’를 해설해 주는 유영대 교수 (사진: 류재형) |
판소리는 한민족 구비문학의 유산으로서 우리 전통문화의 위대한 가치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극예술은 고대 희랍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바탕으로 ‘제4의 벽’ 개념이 정립되어 무대와 객석이 분명하게 분리되어 근대에까지 이어지다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 독일의 시인·극작가)의 서사극 이론에 의해 혁파되면서 무대와 객석은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판소리 마당은 소리꾼과 청중이 한데 어우러지는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서양의 전통 극예술은 작가가 극적 결정력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우리 판소리는 예로부터 1청중, 2고수, 3명창의 전통이 있어 쌍방향 소통이 가능했으며 청중을 ‘좌상객(座上客)’이라 칭했듯이 객석의 추임새가 소리꾼의 더늠(소리꾼의 독창적 창법)으로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명창과 좌상객이 한데 어우러지는 판소리 한마당 전통은 일개인의 창작물이 바탕이 되는 서구의 극예술 전통과는 확연히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리제 전통이다. 김경아 명창의 춘향가는 ‘김세종제’를 이어받았고 심청가는 ‘강산제’를 이어받았다. 김세종제는 동편제 유파이고 강산제는 서편제 유파인데 어떻게 같이 물려받게 되었을까. 강산제는 박유전의 고향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서편제의 시조이다. 서편제는 애절하고 슬픈 음조인 계면조를 특징으로 하는데 시조 박유전에 의해 계보가 탄생했으며 잘 알려진 조상현, 성우향은 이 계보에 속한다. 김경아 명창의 심청가는 강산제 유파를 계승한 것으로 서편제의 미학을 잘 살려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경아 명창과 홍성복 고수, 2021년 6월 25일 공연, 계면조 대목 (사진: 류재형) |
김세종제는 동편제의 갈래이다. 김세종은 신재효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고 신재효는 동편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서편제가 슬픈 계면조가 특징이라면 동편제는 통성으로 내는 우조가 뛰어나다. 특히 정응민의 춘향가는 음악적 감성이 탁월한 귀명창들이 매료될 만큼 극히 어려운 소리라 어전소리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한양 궁궐에서 공연할 만큼 양반층의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사설도 고사성어나 한시 구절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양반 계층 선비들이 많이 즐겼다고 한다. 김경아 명창은 정응민의 제자 성우향에게 소리를 배워 보성소리의 계통을 이었으며 스승의 소리 사설을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어려운 한문투성이의 사설을 꼼꼼하게 분석하여 김세종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문맥에 맞지 않는 대목은 일일이 수정하여 창본의 완성도를 높였고 주석을 세밀하게 달아 『김세종제 판소리 춘향가』, 『강산제 심청가, 유관순 열사가』 창본을 출판해서 후학들의 공부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김경아 명창과 고정훈 고수, 2021년 6월 18일 공연, 우조 대목 (사진: 류재형) |
김경아 명창의 스승인 성우향 선생은 김세종제 계보의 김찬업, 정응민 명창의 소리를 계승한 제자이다. 정응민 명창은 서편제와 동편제를 아우른 보성소리의 창시자로 큰아버지 정재근에게 박유전제(서편제)의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배웠고 김찬업에게 김세종제(동편제)의 춘향가를 배웠다. 따라서 김경아 명창은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보성소리의 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완청 공연을 감상하면서 김경아 명창의 사설에 난해한 한자어가 많아 이해가 어려워 다른 소리제 창본을 비교 감상해 보면서 우리 판소리의 유구한 전통에 대해 다시금 깊이 감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김경아 명창의 이별가 대목에서는 춘향이 이별의 아픔을 토로할 때조차 한자어를 써서 감정을 절제하지만 이화중선의 같은 대목에서는 목매달아 죽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 통곡을 한다. 이 대목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우리 소리의 더늠과 소리제의 다양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마두각(馬頭角) 허거든 오시랴오? 오두백(烏頭白) 허거든 오시랴오? 운종용(雲從龍) 풍종호(風從虎)라. 용 가는 디는 구름가고, 범이 가는 디는 바람이 가니, 금일송군(今日送君) 임 가신 곳 백년소첩(百年小妾) 나도 가지.” (김경아, 『김세종제 춘향가』 창본)
“도련님은 올라가면 나는 남원 땅으 뚝 떨어져서 뉘를 믿고 사잔 말이오? 저 건네 늘어진 양류(楊柳) 깁수건을 풀어내야 한 끝은 나무 끝끝터리 매고 또 한 끝은 내 목으 짬매야 디령디령 뚝 떨어져 나를 쥑이고 가시면 갔지 살려두고는 못 가리다.” (이화중선, 『춘향가』 창본)
이번 완청 공연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위대한 미학에 절감하게 해 준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한다.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어려운 이 시기에 매회 객석을 가득 메운 귀명창들의 열정은 완청(完聽) 공연 취지에 걸맞았고 어려운 옛말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설 어려운 대목이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해설해 준 유영대 교수님, 명창의 소리에 잘 어울리는 장단으로 귀명창의 기운을 돋워준 홍석복, 고정훈 고수님들께 큰 은혜를 입었다. 신명 나는 추임새로 소리판을 완성시킨, 우리 소리의 전통을 이어줄 후학들께서 우리 소리판의 진미(眞美)임을 거듭 되새기게 된다.
이한수(李漢壽, Lee hansu)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인천 인성여자고등학교 교사
교재 『최소한의 동양고전』, 시집 『경계의 미학』 출판
(사)우리소리 이사, (사)인천교육연구소 이사
참고: 이한수의 공감 스토리텔링 블로그 https://blog.daum.net/2ha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