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을 화폭에 담다: 해반문화사랑회 최정숙 이사장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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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백령을 화폭에 담다해반문화사랑회 최정숙 이사장과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정숙(崔正淑)
1954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동대학원 서양화과 수료. 현재 사단법인 해반문화사랑회 이사장. 1993년 해반갤러리를 기반으로 한 해반문화사랑회를 창립하였다. 해반문화사랑회는 1997년 인천 문화예술단체 최초로 사단법인이 되었다. 2000년 <열려있는 땅, 인천> 전을 통해 개항 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탐구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15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개최하였다.

* 본 인터뷰는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문학평론과 문화평론을 쓰는 류수연이라고 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위해 간단하게 이사장님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최: 소개라고 할 것이 있나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고, 또 지역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문화 영역에서 함께 하는 여성 동지와 만나니, 처음 뵙는 데도 굉장히 친숙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우리 여성들끼리는 좀 더 통하는 것이 많잖아요.

류: 네, 그렇지요. 저도 처음 뵙는 데도 원래 알던 분처럼 친숙한 느낌이 드네요. 아무래도 전화 통화 하면서 일차적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하하.

최: 여성으로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제 삶이 그러했어요. 현실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괴리. 그런 것들이 참 많았지요. 그걸 여성들 사이에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결혼하고 홍대 대학원 다니다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류: 그러셨군요. 그러면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하시게 된 시점도 그 즈음인 건가요?

최: 처음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한 건 부부가 함께였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큰 모임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엔 시민 갤러리 개념으로 시작했죠. 1991년 현재 해반문화의 근간이 된 해반갤러리를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는 시민애호가 모임으로 시작한 개념이었어요. 그것이 현재의 해반문화사랑회가 된 거죠. 우리 해반문화사랑회는 인천에서 자생한 첫 사단법인화 한 단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죠.

류: 인천을 기반으로 시민사회에서 문화단체를 뿌리내리게 했다는 자부심도 크셨을 것 같아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개인 작업은 뒤늦어진 면이 있어요. 2003년에 시민단체 성격의 갤러리 활동을 정리하고 2004년부터 개인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처음에는 두려웠죠.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대학에 다니면서 한국 컨템포러리의 대부님들께 많이 배웠거든요. 그때 각인되었던 것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었어요. 그 고민이 사실 7년 이상 지속되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바로 그림을 착수한 것이 아니에요. 처음엔 사진 작업으로 시작했어요. 그때 앱손 프린터가 처음 나왔거든요. 어디 배울 곳은 없으니까 혼자서 붙들고 고생하면서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도출했었죠. 처음 시작은 흑백톤으로 사진을 뽑아서 그것을 가지고 시작했죠.

류: 어떤 계기로 다시 개인 작업을 시작하기로 생각하게 되신 건지도 궁금해지는데요.

최: 갈증 같은 것이었죠. 제가 91년도에 건강이 좀 안 좋았어요. 자궁을 적출했거든요. 거기서 오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또 보다 의욕적으로 살고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죠. 처음 해반갤러리 시작할 때에는 인천이 상당히 문화적으로는 불모지에 가까웠어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이 컸죠. 그래서 처음에는 전시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죠. 인천을 중심으로 서울과도 연계하면서 작품 전시를 열고, 그런 일들을 주로 했어요.

류: 기획과 함께 큐레이팅도 직접 다 하신 거네요?

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죠.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내 안에 갈증과 함께 남모르는 대가들도 생기더라고요.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욕망의 대가가 생각보다 컸어요. 특히 경제적인 출혈이 굉장히 컸어요. 전시라는 게 한 번 열 때마다 많은 돈이 들어요.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추진한다고 여겼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거든요. 물론 이런 것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경제적 가치보다 이상이 더 컸고, 그것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일들을 13년 정도 하다 보니까 거기에서 오는 피로가 크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다시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류: 아까 부부가 함께 시민문화운동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일을 나누게 되신 건가요?

최: 그렇죠. 해반문화사랑회가 1997년 사단법인화되면서 저는 주로 해반갤러리 기획전시를 하고, 남편은 주변의 추대로 초대이사장을 맡게 되었죠. 저는 제 활동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어요. 문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장을 만들었다는 그 뿌듯함이 그것이었죠. 인천의 오피니언 그룹과 함께 여러 활동들을 진행하고 갤러리를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였죠.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직면하기도 했어요.

류: 어떤 것이었을까요?

최: 93년 무렵에 당시 인천의 부촌이었던 부평에 갤러리를 열었거든요. 아무래도 그쪽이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으니 갤러리 활동에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결과는 엄청난 적자였어요. 하하. 그래서 다시 동구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다시 시작한 것이 해반문화포럼이었어요. 인천의 문화를 개척하는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뜻을 같이하는 20여 분 정도와 함께 시작했어요. 이렇게 인천에서의 소문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문화에 대한 대안들이 계속 포럼을 통해 나오니까 지역사회의 관심도 높아졌죠. 사실 이 포럼이 인천의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데 상당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해반문화가 2020년 인천의 비전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고요.

류: 굉장히 의미 있는 활동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에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최: 근대개항이라는 키워드를 끌어낸 것이 그래요. 2000년에 우리가 인천의 정체성과 정주성, 이런 문제들을 포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떠오른 것은 바로 근대개항이라는 문제였어요. 인천에 무엇이 있는가를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다름 아닌 개항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개항으로부터 진짜 인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이런 생각들이 결국 인천을 상징하는 하나의 포문을 연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인천에 산재했던 문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마련된 거죠. 또 시민들에 의해서 인천문화가 이끌어질 수 있다는 어떤 토대로 마련되었고요. 저는 그래서 2000년에 열었던 <열려 있는 땅, 인천> 전시가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인천은 무엇이냐는 하나의 상을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류: 2000년이면 제가 막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인데, 저도 그 무렵부터 개항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인천을 사유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이사장님의 역할이 크셨던 거군요.

최: 2004년부터 개인 작품 활동하면서 해반 일과 소원했다가 제가 해반이사장을 맡으면서 돌아온 것은 2011년이었어요. 2005년에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재청이 만들어지면서 유홍준 교수님의 답사기 열풍으로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클 때였어요. 문화재청 문화유산방문교육 공모사업에 해반문화가 지원했거든요. 이전부터 개항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단체여서 주목을 받았기도 하였고 언론도 많이 탔고요. 그때 우리가 주목한 것이 어떻게 하면 사라져 가는 개항의 유산을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시민 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죠.

류: 그 과정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신 결과는 무엇일까요?

최: 바로 인천아트플랫폼이죠. 개발 논리에 사라질 뻔했던 인천아트플랫폼을 문화적 콘텐츠 그대로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인천아트플랫폼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드는 운동을 전개했거든요. 미술관 운동도 했고요. 인천문화재단이 등장하기 전에 실질적으로 그 물꼬를 텄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또 당시 시작되었던 문화유산운동에 있어서도 원년 멤버로 이끌었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사실 인천이 당시 수도권에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실제로 이런 사회적 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2012년 문화재청상, 2013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고요. 그 계기가 된 문화유산교육은 지금까지도 잘 진행하고 있어요. 문화지킴이 교육도 지속되고 있고요.

류: 네, 저도 기사로 수상 내용을 접했습니다. 오랜 시간의 활동에 대한 인정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큰 응원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각도를 돌려서 화가로서 이사장님의 개인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는데요. 이사장님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백령도인데요. 백령도를 본격적으로 작품의 주제로 담게 되신 계기는 무엇일까요?

최: 사실 백령도는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에요. 가끔 제가 백령도가 고향인 줄 아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어린 시절을 백령도에서 보내기도 했지만, 사실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린 시절에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저에게는 추억이 많은 곳이죠. 주로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냈거든요. 하지만 제가 백령도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데는 다른 계기도 있었어요.

류: 어떤 일이었나요?

최: 2011년이 한 기점이었죠. 그 무렵에 우리 아들이 공중보건의로 군대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당시 연평도 아니면 백령도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백령도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 뭔가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 어린 시절이 있는 곳에 이제 다시 아들이 갔으니까요. 같은 해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사건을 피해간 것도 그런 운명적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고요. 그때부터 백령도를 주제로 작품을 시작했고, 《분쟁의 바다 화해의 바다》라는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사실 여기에 그린 작품들이 제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다시 시작한 것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바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가 사진에서 유화 작업으로 전환되는 기점이 된 작품이죠. 사실 이 작품은 같은 주제와 제목으로 사진과 유화 작품이 둘 다 있어요. 특히 유화로 그린 <아버지의 바다>는 대학원 졸업 후에 다시 그림을 시작하면서 처음 그린 유화였다는 점에서 저에게 의미가 커요.

최정숙, <아버지의 바다>(유화, 130×97, 2011) ⓒ최정숙

류: 정말 뭔가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사장님, 백령도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궁금해집니다.

최: 내 첫 기억은 5살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밤에 할머니 댁 마당에 누워 있는데 정말이지 밤하늘에 별이 한가득 쏟아질 것처럼 차 있었거든요. 그런 기억들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 거죠. 사실 백령도는 분쟁의 아이콘이고 분단의 아픔이 드리워진 곳이고, 나에게 있어서 한 집안의 역사이기도 해요. 아버지는 백령도 분이고 우리 어머니는 황해도 분이시거든요. 아버지 집안이 백령도의 부농 집안이셨고요. 광복 후에 최초로 면장을 하셨어요. 섬을 둘러싼 여러 이미지들이 있죠. 섬은 허락해야 들어간다는 말 들어보셨죠. 백령도가 그래요. 봄이면 해무가 엄청나서 진짜 섬이 허락한 날에나 가볼 수 있는 곳이죠. 내게 백령도는 참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의 고난한 삶과 화해,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의미였어요. 육지와 섬을 이어가는 것이 내 삶의 원초적 기억이니까요. 결국 백령도를 주제로 담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그곳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백령도 드로잉 전시를 하기 시작했죠.

류: 이사장님의 드로잉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백령도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는 거군요.

최: 사실 우리 부모님은 인천 인물사에서도 다루어지고는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면장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셨던 것이 간척사업이었어요. 섬이니까 농지가 절실했던 거죠. 그래서 1971년에는 백령도에 아버지 공적비가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정말 열정적인 분이셨죠. 너무 많이 고생하셔서 그렇게 일찍 가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머니 집안은 천주교를 빨리 받아들인 집안이었고, 어머니도 독실한 신자였어요. 부모님 결혼하실 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머니가 처음에는 소개받는 남자가 백령도 사람이라고 해서 사실 관심이 없었대요. 섬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그런데 만나 보니 아버지가 섬사람 같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가 잘생기셨어요. 첫눈에 반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 역시 양보할 수 없었던 게 천주교였나 봐요. 아버지한테 혼배를 해야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대요. 당시로서는 굉장한 선택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그걸 하신 거예요. 하하. 그렇게 결혼을 하셨고, 어머니는 백령도의 첫 천주교 신자가 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의 삶이 참으로 아픈 삶이에요. 분단 이후에는 어머니 고향은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으니까요. 더구나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더욱 고난한 삶을 보내셨죠.

류: 이사장님 어머님의 삶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바다 건너 고향을 바라보면서 가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떠셨을지 저는 감히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도록과 작품을 보면서 이사장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진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인천문화재단이나 인천의 문화예술인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최: 저는 화가니까 일단 열심히 작품을 그려야죠. 그만큼 열심히 전시도 하고 싶고요.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지만, 코로나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처럼 해반을 잘 이끌고. 사실 제가 이끄는 것도 아니에요. 워낙 뛰어나신 분들이 계셔서 진짜 알아서 척척 해주세요. 저는 그 안에서 해반이 그 중심을 잃지 않도록 균형만 잡으면 되는 사람이죠. 그렇게 해오던 대로 계속 열심히 해나가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류: 마지막까지 이사장님의 한결같고 든든한 문화에 대한 애정이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 저도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감사해요.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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