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로 기억하고, 연대하고, 남기다: 커뮤니티 판화전 《우리 마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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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로 기억하고, 연대하고, 남기다커뮤니티 판화전 《우리 마을에는…》

조숙현

동인천고등학교 2층 교무실 복도에 위치한 오동나무 갤러리는 학생들을 위한 생활 예술 공간이다. 고등학생들이 평소 갤러리나 미술관을 갈 수 없는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여 학교 안에 꾸린 오픈형 전시 문화 공간인 셈이다. 2021년 3월 한 달간 진행되었던 커뮤니티 판화전 《우리 마을에는…》은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에서 2017년부터 현재까지 인천 주민들과 함께 제작한 목판화 9점을 전시했다.

커뮤니티 판화전 《우리 마을에는…》 전경(사진: 윤종필)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는 아직 국내에 생소한 현대미술 장르이다. 공동체와 지역 사회를 지칭하는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실천하는 매우 새로운 개념의 커뮤니티 아트는 종종 행동주의와 사회참여의 형태를 띠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93년 시카고에서 독립 큐레이터 메리 제인 제이콥(Mary Jane Jacob)이 참여한 ‘Culture in Action’ 프로젝트는 커뮤니티 아트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이 프로젝트는 시카고 도시 전역에 걸쳐 도시의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더 나은 커뮤니티와 사회 구성원과의 소통을 위해 2년 동안 다양한 문화 실천을 선보인 선구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비행 청소년들과 함께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스트리트 필름을 제작하거나 지역 주민들과 동네 텃밭을 일구는 등이 구체적인 사례이다. 커뮤니티 아트는 기존의 시각 예술 관점에서는 생소하지만, 예술이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벗어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사회적인 실천을 행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전위성과 새로운 가치를 획득한다.

한국에도 2000년대 초반에 커뮤니티 아트에 관한 공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폭발적으로 형성된 전례가 있다. 당시 지역문화재단들에서 커뮤니티 아트와 관련한 기금이 형성되고 이에 부응하여 다양한 예술가들의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가 시행된 바 있다. 그러나 관주도형 커뮤니티 아트가 가지는 한계는 예술가와 지역 주민들의 갈등을 초래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공적 자금이 투입되다보니 커뮤니티 아트의 타깃은 ‘사회 소외 계층’ 혹은 ‘경제적 낙후 지역’에 국한되었고, 실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현장에서 예술가는 ‘Culture in Action’을 꿈꾸지만 정작 지역주민들은 커뮤니티에 대한 자발적인 선의로 똘똘 뭉친 시카고 시민이 아닌 생계형 주민들인 현실 속에서 프로젝트는 종종 동상이몽의 볼모지에 표류되곤 하였다.

삶-피, 땀, 눈물(인천광역시 동구, 122×244cm, 2020)(사진: 윤종필)

커뮤니티 아트의 짧은 화양연화가 지나가고 난 뒤, 실패 원인을 돌이켜보면 예술가와 지역주민을 잇는 매개자의 부재와 한계가 종종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인천을 기반으로 한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은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꾸물꾸물’은 ‘꿈을 꾸는’이라는 뜻과 글자 그대로 꼼지락꼼지락, 사부작사부작, 조심스레,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무언가를 행하는 작은 역동성을 나타낸다. 커뮤니티 판화 프로젝트는 인천 주민들 10여 명이 함께 10주 동안 완성하는 목판화이다. 인상적인 것은 122×244cm의 대형 사이즈와 아마추어의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결과물의 퀄리티이다. 커뮤니티 아트 결과물의 아마추어리즘은 고질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판화는 시각예술 전통 장르 중에서 드물게 협동이 과정에 장착된 케이스이다. 판화 한 점을 제작하기 위해 사람들은 드로잉을 하고, 목판을 칼로 파내고, 잉크를 칠하고, 종이에 판화를 찍고 말린다. 전시장에는 판화를 만드는 과정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참여자들이 모두 합판 위에 올라가 발로 판화를 찍어내는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커뮤니티 프레스’인 셈이다. 꾸물꾸물문화학교 교장이자 커뮤니티 아트 기획자 윤종필의 섬세한 기획이 돋보이는 면이 바로 여기인데, 대형 목판화라는 매체가 완성되는 과정의 특성을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와 결합한 전략이 다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개항장 연대기(인천 중구, 122×244cm, 2017)(사진: 윤종필)

한편 목판화의 내용은 인천의 중요한 현대사와 지역의 특징들을 담고 있다. 커뮤니티 판화 첫 번째 프로젝트 <개항장 연대기>(인천 중구, 2017)는 인천 중구 개항장의 다양한 모습과 풍경을 담고 있는데, 개항장은 인천의 중요한 상징적 지역이다. <송도 유원지의 추억>(인천 연수구, 2020)과 <oh! 연수>(인천 연수구, 2020)는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송도 유원지 등 연수구의 노스탤지어적인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 재개발로 인해 사라진 주안3동의 풍경을 재현한 <동네, 살아지다>(인천 미추홀구 주안3동, 2019)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또한 기획자 윤종필이 인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과 이것을 객관적으로 고증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커뮤니티 판화 프로젝트는 인천의 지역 역사를 리서치하고 향토학자들의 조언을 거쳐 웹 이미지로 리서치한 시각적인 레이아웃을 빔프로젝터로 합판 위에 투사하고, 여기에 주민들이 협동하여 드로잉을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기억하라! 인현동 1999로부터 코로나19까지 생명, 평화, 안전을…(122×244cm, 2020)(사진: 윤종필)

풍경의 서사보다 더 큰 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천의 현대사를 판화로 소환하는 작업들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억하라! 인현동 1999로부터 코로나19까지 생명, 평화, 안전을…>(2020)이다. 1999년 인현동 호프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청소년들이 사망했던 사건은 뉴스 보도 뒤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지만 이렇게 기억하는 커뮤니티로 인해 다시 작품으로 회생하여 소환된다. 커뮤니티 아트가 공간의 확장을 넘어 역사적인 반추로도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숙현(趙俶賢, Cho Sookhyun)

연세대학교 영상 커뮤니케이션 석사를 졸업하고 커뮤니티 아트를 주제로 논문을 썼다. 현대미술 전시기획자와 미술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대미술 전문 출판사 아트북프레스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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