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선일체”는 허구, “내선차별”이 실제(김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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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선일체(內鮮一體)는 허구이고 내선차별(內鮮差別)이 실제이다

김락기(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

1942년 7월 25일 오후 두 시 무렵 스물다섯 남짓한 청춘남녀가 인천부 서공원(西公園), 즉 현재의 자유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휴일을 앞둔 여유로움이 두 사람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일본식 이름을 신촌 대(新村大)라고 하는 조선사람 전치봉(全治鳳)이고, 여자는 정목귀례(正木貴禮)였는데, ‘귀례’라는 이름이 일본인에게는 흔치 않아 창씨(創氏)한 조선사람으로 생각된다.

이 둘은 인근 송현국민학교의 교사였다. 전치봉이 1942년 4월에 송현국민학교에 임시교사로 부임한 후 가깝게 지내게 되었으므로, 요즘 말로 소위 ‘썸’타는 사이로 보인다. 이날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을 두 사람의 산책은 즐겁게 끝나지 않았다.

산책 중에 전치봉은 ‘최근 고급 생과자는 일본인에게는 잘 돌아가지만 조선인에게는 배급되지 않는다. 또 도시락통과 목탄(木炭) 등도 일본인에게만 돌아가고 우리 같은 조선인에게는 돌아가지 않으니 당국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 운운하지만 이처럼 불공평하다. 내선차별(內鮮差別)의 좋은 예도 있다. 국어(일본어) 사용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일본어로 대화하지만 친분이 있는 가까운 사람과는 조선어가 아니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조선어는 세계에서도 우수한 언어이고 조선인 전체가 일본어를 상용하는 것은 먼 미래일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1942년은 일본제국주의가 진주만 기습으로 일으킨 소위 ‘태평양전쟁’의 초반 기세가 주춤해지면서 조선에서도 징병제가 실시되는 등 가용 가능한 모든 인적ㆍ물적 자원을 끌어모으던 시점이다. 1940년에는 조선인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는 등 식민통치의 양상도 더욱 폭압적으로 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 전치봉의 말은 바로 총독정치에 대한 불온한 언동(言動)으로 간주되었다. 10월 20일 시점에는 이미 경찰 조사를 받았고, 11월 6일 인천경찰서장이 기소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라는 문서를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검사에게 보냈으므로 7월 25일 산책으로부터 아주 멀지 않은 시점에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경찰서장이 보낸 문서에는 전치봉의 전력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재했는데, 내용 전반은 이 사람이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다는 근거를 제시하는데 치중한 느낌이다. 자신들의 기소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전치봉이 가졌다는 민족의식의 배경이란 게 당시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근거로 든 것은 전치봉이 고향인 함경남도에서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그 학교에서 일어난 동맹휴교(同盟休校) 사건과 학생 소요사건, 공산주의 그룹사건에 자극을 받아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사건에 참여한 것도 아닌 사람을 ‘그랬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한 자의적 추측에 불과하다.

또 전치봉이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해 하숙을 하며 당시 46세 정도의 박추영(朴秋英)이란 여성과 교유하며 민족주의 사상을 지도받았다고 했는데, 박추영 이 어떤 인물인지 일제 경찰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전치봉은 1943년 2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당일 출소했다. 산책 중의 ‘불온’한 언동을 했다는 것 치고는 매우 무거운 처벌이지만, 거꾸로 전치봉을 매우 불순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엮으려고 했던 일제 경찰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둘 사이에 나눈 대화는 어떻게 경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폭압적인 일제 통치에 두려움을 느낀 정목귀례가 신고했을까? 아니면 뭐라도 엮어서 조선인을 억누르려는 분위기에서 평소 주목하던 전치봉을 목표로 삼아 일제 경찰이 주변을 샅샅이 털어 알게 되었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차별적 현실에 대한 조선사람의 작은 불만조차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일제 식민통치의 폭압성과 패망으로 가는 과정의 초조함만은 분명하다.

[이글은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에서 발행하는 《인천역사통신》2020년 가을호(2020년 9월 1일 발간예정)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김탁봉(金沰鳳)’으로 등록되어있으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의 “보안법위반피의사건 검거에 관한 건(1942년 11월 6일 인천경찰서장)”에는 전치봉(全治鳳)이라 쓰여있고, 아버지도 전창일(全昌一)이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성을 ‘김(金)’이라 했는데, 카드 작성 당시의 부주의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탁(沰)’은 흘려쓴 ‘치(治)’를 잘못 읽은 것이다.

전치봉[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문서>“보안법위반피의사건 검거에 관한 건(1942년 11월 6일 인천경찰서장)”의 전치봉 인적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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