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스타,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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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스타, 사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1960~70년대 故 서영춘 선생이 자주 불렀던 유행가의 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바다 중에 왜 하필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을까. 인천과 사이다는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부터 사이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이다는 사과로 만든 독주(毒酒)를 의미하는 라틴어 ‘시케라(sicera)’에서 유래하였다. 사과로 만든 이 술은 프랑스로 전래되어 ‘시드로(cidre)’라고 불렸고,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사이다(cider)’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포도 대신 사과가 더 흔했기 때문에 사과주인 사이다를 즐겨 마셨다.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양에서 사이다를 주문하면 투명한 탄산음료가 아닌 2~13%의 알코올을 함유한 다양한 종류의 사과주가 나온다.

사이다가 사과주가 아닌 탄산음료를 가리키게 된 것은 근대 일본의 영향이 컸다. 1868년 영국인이었던 존 노스와 레이가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에 ‘노스 앤 레이’ 상회를 설립하였다. 이 상회에서는 레모네이드와 같은 탄산음료를 팔았는데, 특히 사과와 파인애플의 향이 나는 복합향료가 첨가된 탄산음료 ‘샴페인사이다’를 판매하였고, 이를 처음 마신 사람들은 그 맛과 향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샴페인사이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탄산음료를 ‘사이다’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해 사이다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궁궐에 납품하거나,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관에게 판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사이다는 점점 대중화되면서 수입 사이다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1905년 히라야마 마츠타로(平山松太郞)는 인천 화정(현재 신흥동)에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설립하였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미국식 제조기를 사용하여 50마력의 전동기로 제조’하는 사이다 공장이었다.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는 성인표(星印標) 사이다와 일생표 사이다를 생산하였는데, 성인표 사이다는 별 모양의 상표로 인해 ‘별표 사이다’라 불렀다. 별표 사이다는 여름철 음료로 전국적인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당시 광고 매체가 몇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인선 열차 전면 광고를 게시하기도 하였다. ‘별표 사이다’의 인기에 힘입어 1910년 나카야마 우노키치(中山宇之吉)가 ‘라무네제조소’를 설립하였다. 라무네제조소에서는 ‘라이온 헬스표 사이다’를 생산하였는데, 라임향 등이 첨가된 레몬에이드의 일종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이다는 더욱 인기가 많아졌다. 사이다는 각종 운동회 후원품 목록에 항상 들어가 있었으며, 종교 단체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구호품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30년대에는 전국의 사이다 공장의 수가 50개소가 넘을 정도로 번창하였다. 이렇듯 사이다 공장은 늘어났지만, 규모는 작아서 생산한 음료를 보관할 시설도 부족했다. 게다가 한여름에는 많은 수요를 충족하지 못해 일본에서 수입해서 팔기도 했다. 이렇듯 소규모 생산의 한계를 드러내자 1937년 서울 6곳, 인천 2곳의 사이다 공장을 합쳐 경인합동음료(주)를 설립하였다. 경인합동음료(주)의 주력 상품은 ‘스타사이다’였다. 스타사이다는 ‘별표 사이다’의 상표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사이다의 원조임을 강조하였다. 스타사이다의 인기와 영향으로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광복 이후 경인합동음료(주)는 적산기업으로 분류되었고, 손욱래가 이를 불하받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 개의 사이다 공장이 난립해 있었지만, 스타사이다의 인기는 그대로였다. 1946년과 1947년 신문에는 “하절기를 당면하여 수요가 격증함을 기회로 협잡배가 자사 상표를 도용해가지고 위조 스타사이다를 제조하여 공연히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으니 주의해 달라는 내용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그러던 1950년 동방청량음료가 ‘칠성사이다’를 출시하면서 ‘스타사이다’의 인기는 시들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1960년대 초 새로운 맛을 가미한 ‘뉴스타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이다를 출시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말 사이다 공장 간의 극심한 판매 경쟁과 ‘코카콜라’, ‘펩시콜라’가 국내시장에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면서 위기는 계속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수의 사이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1975년 경인합동음료(주) 또한 진로에 인수되면서 70년간 이어오던 인천 사이다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 생산된 사이다에 ‘별표’라는 이름이 붙고 별 모양의 로고가 사용되면서 ‘별’은 사이다를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대구의 ‘삼성사이다’, 부산의 ‘월성사이다’, 전주의 ‘오성사이다’ 등 각지에서 생산되는 사이다에는 별을 뜻하는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동방청량음료의 칠성사이다는 롯데제과에 인수된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이다가 되었고, 지금까지 별과 사이다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소풍이나 외식 등 사람들은 많은 순간 사이다를 찾지만 특히 속이 더부룩할 때 소화제 대신 사이다를 마시곤 한다. 사실 사이다가 소화에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뻥 뚫리는 느낌 때문에 사이다를 마셨다. 이러한 사이다의 청량감 때문에 사람들은 드라마나 연재소설에서 답답한 상황이 해소되는 순간 ‘사이다 같다’라는 표현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사이다 같다’라는 표현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은 실생활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하여 시원한 감정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번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7월 21일 작은전시 <인천의 스타, 사이다>를 개최할 예정이다. 우리와 함께해온 사이다와 관련된 내용을 전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들의 지친 일상에서 ‘사이다 같은 사이다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연구원
최병훈(崔炳勳, Choi Byeong hune)

202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작은전시 <인천의 스타, 사이다> 전시 포스터
스타사이다 병(출처: 신연수)
경인사이다 상표(출처: 인천광역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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