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문을 한번 여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짚어 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천에 절반에서 훨씬 못 미치게 발을 딛고 살아온 시간이 30년이 넘는다. 인천의 역사적 사실들이나 문화유산 그리고 작금의 문화예술들 속에서 문화적 가치를 찾는 일이라면 공부를 하고 답사를 해서라도 조금은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인천에 뿌리박고 살고 있는 분들이 훨씬 더 귀한 작업들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몫은 아닌 것 같았다. 틈틈이 발을 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외지에서 살아 온 나로서는 마음속에 ‘윤곽’으로 그려지는 개인 경험들을 되짚어 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엉뚱하게도 북미 원주민 사회들을 답사하다가 만난 한 고고학자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자세한 것들을 묻지 말고 단 한 가지 그들 삶 의식을 관통하는, 주제가 담긴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었다. “강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참으로 막연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잠자코 그의 말을 따라 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이 질문이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즉각적으로, 단 몇 마디로 강에 얹혀사는 자기 삶을 압축해 표현했으며 어떤 이는 새삼 성찰적으로 삶을 돌이켜 보곤 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강에 얹혀서 사는 자기 문화에 대한 ‘가치’ 표현이었다. 어떤 이는 매우 실용적 차원에서 어떤 이는 매우 철학적이고 미학적 차원에서 문화적 가치를 표현했다.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 이번에는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인천은 내게 무엇일까?” 그런데 인천에 정주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몸 부대껴 온 바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 안에 살 때의 경험에서도 밖에서 드나들 때의 경험에서도 인천은 내게 통로(route)로 접촉점으로 길 혹은 거리(street)로만 떠올려진다. 그것도 시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통로, 접촉점, 길 등이다.
유년기부터 중학교까지 현 제물포역 뒤 인천대학교 앞쪽, 한 곳에서 살았다. 이 일대는 피난을 와서 간신히 일터를 잡은 직장인들과 소상인들과 토박이 농민들이 섞여 살았다. 그래도 인천 도심 외곽에 있는 주택가로 당시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들이었다. 흙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단층 기와지붕의 서양식 반 한옥 반 형식의 집을 짓고 대문 안 쪽에는 마당을 두었으며 밖으로는 작은 텃밭을 두었다. 어떤 집은 텃밭 대신에 우물터를 두었다. 마을 바로 옆에는 몇몇 농가들과 밭들이 있었고 곧바로 그 옆으로 화교 동네가 있었다. 화교 동네의 건축 양식은 사뭇 달라서 붉은 벽돌로 사방을 두르고 가운데 마당을 둔, 좁은 창문의 집들이었다. 창문틀은 거의 어김없이 푸른색이었다. 화교들은 대부분 마을 근처에서 혹은 뒤쪽 ‘성광학교’ (구 선린학원, 인천대학교의 전신) 산을 넘어서 채소 농사를 했다. 나의 어렸을 적 ‘통로’에 대한 경험은 우리 동네에서부터 옆의 농가들 그리고 화교 동네로 이어진다. 단오 때에는 농가 큰 앞마당에 높이가 10미터는 넘었음직한 그네가 설치되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처녀들부터 아줌마들까지 그네에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어느 가을밤 드럼통 위에 놓인 작두 위에 오른 무당을 보고, 밤하늘에 대비되면서 불빛을 흐트러뜨리던 붉은색, 푸른색 옷가지들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적이 있다. 그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필자의 중부지방 도당굿의 첫 답사이다. 한편 화교 동네는 색다른 경험을 주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꽁꽁 사방을 두른 집 모양새나 푸른 창틀이나 이곳저곳에 붙은 붉은색 글씨와 문양들이나 음험해 보였다. 그곳 사람들이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네가 아니라 우리 집 바로 뒤에 살던 화교 한 집의 나보다 다섯, 여섯 살 위로 보이던 소년으로부터 십팔기(十八技)를 배우면서부터 그 동네에 대한 두려운 생각도 사라졌다. 자기 집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작은 칼 두 개를 들고 춤추는 듯 몸을 날리던 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그 후 빵도 얻어먹고 좋은 나날을 보냈다. 이후 화교 동네에도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기 시작했고 집 마당으로 들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당’이었던 것 같은 좀 무서운 공간도 보았다.
피난 내려 와 인천에 자리잡은 일가친척 중에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현 숭의동 공설운동장 뒤 전도관 밑 산기슭에 살았다. 아주 좁고 구불거리는 동네 길 한켠에 흙벽돌로 두어칸 짜리 집을 짓고 거기서 소소구레한 일들을 하면서 사셨다. 작은 할머니가 생선을 공판장에서 받아다가 ‘다라이’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생선 행상을 하셨는데 집 마당에는 그물에 말리는 생선들이 아래 쪽 공설운동장으로 이어지는 하늘에 나부꼈다. 도화동에서 숭의동 언덕길로 걸어서 그 작은 골목길을 지나 그 집에서 공설운동장의 운동 경기를 보던 나날들이 있었다. 야구는 동산고등학교 팬이었고 동인천고등학교도 좋아했다. 모두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들이었으니까…당시는 야구가 인천사람들에게 묘한 정서를 낳는 것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경기 룰에서부터 정교한 테크닉, 그리고 스타킹과 꼭 끼워 입은 줄무늬 바지와 모자 등등이 무언가 ‘근대’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것 같았고 그게 근대도시 인천의 취향과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고교야구는 지방들 간의 경쟁의식과 ‘지방 즐기기’까지 선사하는 것이었다. 서울 이외에 부산, 대구, 광주, 군산 등등이 인구에 회자되는 중요한 계기가 선거 말고는 고교 야구가 컸던 것 같다. 여하튼 나도 부산고가 어떻고 군산상고가 어떻고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떠들어대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어머니가 교사로 있던 축현 ‘국민학교’를 다녔다. 엄밀히 말해서 그냥 쫓아 다닌건데 그래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라 했고 실제로 교실 수업도 며칠 동안 받았다가 선생님들이 달래서 ‘졸업’했다. 사실상 학교 공부보다도 학교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현 제물포역 앞 길이 당시에는 주요 지방도로로 신작로라 불렸다. 그 신작로에서 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리면 참으로 감미롭고 신선한 경험세계가 펼쳐졌다. 축현 학교 담장에 내 기억으로는 장미였는지 찔레였는지 빨간 꽃들이 길게 이어졌고 담장 건너 길 맞은 편, 동인천역 작은 광장 한 코너에 있던 제과점에서 빵굽는 냄새가 났다. 아침 햇볕이 길거리에 쏟아지고 그건 내게는 다사로운 노란색이었다. 건물 그늘이 진 곳은 상큼한 바람이 불었다. 빵굽는 냄새와 노란 햇볕과 건물 그늘…이런 것들이 모여서 ‘도시’의 취향이 되었다. 이따금 병원에 가느라 경동 ‘싸리재’ 길에도 가고 신포시장 밑 동방극장에 쫓아가 영화도 봤다. 당시 도심 여러 곳들에 적산가옥을 개조한 점포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건물 양식은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모두가 ‘현대식’ 쇼윈도에 타일 건물들로만 느껴졌다. 동방극장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 안에는 극장 내부에 하얀 색상에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것으로 기억되는 원형 타일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어째 중국풍인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인천 도심의 경험은 초등학교 입학 후에 확대된다. 그림그리기 대회 때문에 자유공원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그 코스가 현 인천문화재단 자리 창고들, 구 시청 그러니까 현 중구청 그리고 차이나타운을 거치곤 했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이라 이름이 붙어있지만 당시는 이름이 없이 인천 도심의 한 길거리에 있는 중국인 사는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내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목조 이층 건물 곳곳에, 그리고 이층 베란다 앞틀에 본래 입혔던 붉고 푸른 색들이 바래고 벗겨져 현란함과 퇴락의 느낌이 교차하고 거기에 널어놓은 빨래들과 이층 베란다를 다니는 가족원들의 머리모양과 의상까지 더해졌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시각적 이국(異國) 정서를 넘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 방식의 살림살이, 그것도 한국 땅에서 퇴락해가는 살림살이의 구차한 모습들이 그 건물과 의상들에 찌들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려서 이것저것 잘 알지도 못하지만 색다름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저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조부모께서 이북에서의 생업을 잇고자 1960년대에 현 석바위 법원 인근에서 과수원을 시작했다. 논밭 사이에 낀 작은 구릉지에 과수원이 있었고 좁은 논길을 걸어 경인선 철로를 넘어 산모퉁이를 돌면 주안염전과 갯벌이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숭의동에서 도화동 집까지 걸어 책가방을 놓고 다시 석바위의 과수원에 갔다. 제물포역에서 주안역까지가 2.1Km인지 2.5Km인지 여하튼 2Km남짓한 거리였는데 꼭 그 선로를 따라 걸었다. 굵은 못을 갖고 다니다가 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면 납작하게 눌려진 못을 거두어 모아두곤 했다. 콜타르였을 것이다. 선로 밤나무 침목들을 딛고 뛰면서 침목에 발라놓은 목재 보호제의 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지만 그것은 일상적 주거나 농촌 생활에서 나는 냄새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당시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제 보면 그 화학제품의 냄새가 ‘근대’에 대한 감각으로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과수원 작은 농가 방에 누우면 또 다른 냄새가 났다. 집 벽으로부터 흙과 짚 냄새가 섞여서 났고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와 함께 늦은 오후를 진득하고 뉘엿하게 만들었다. 과수원 밖을 나서서 자주 가는 곳이 염전이었다. 한 1Km 정도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는 길 산모퉁이가 시각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하나의 문턱이었다. 그 모퉁이를 넘어 펼쳐지는 세계는 과수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염전 바닥의 타일에서부터 열이 올라와 얕은 바닷물을 후끈거리게 하고 수로 곳곳에 수차를 밟아 바닷물을 염전으로 품어내는 염부들이 있었다. 주안염전에는 바닷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 저수지 너머로는 깊게 파인 갯골들과 검은 갯벌들이 뜨거운 햇볕에 드러나 있다. 길에는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소금창고들이 누워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고즈넉함과 외롭고 처연함을 만드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태양의 이글거림과 고무신 안쪽까지 스며들어 온 개흙의 진득거림이 어우러져 미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필자는 여름에 저수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해 아니면 시원한 소금창고 속에서 만화책을 보기 위해 염전에 가곤 했는데 이런 일들을 즐기기 보다는 염전과 갯벌과 사람들 일하는 모습의 강렬하고도 적막하고 처연한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짓눌려 돌아오곤 했다.
대학 다닐 때의 단골 여로는 다양했다. 그런데 그곳들 어느 한 구석에서도 단순하고 단일하고 투명한 장소감과 장소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중첩되어 있었고 비유를 하자면 장소들이 목소리가 청명한 게 아니라 허스키 풍으로 복합적이거나 걸지거나 삭혀 있었다. 동인천역에서 구 인천여고 가는 길로 조금 접어들다 보면 밴다방이라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생긴 다방으로 디스크자키가 있었고 클래식이나 조금 조용한 팝송, 당시 활발했던 통기타 가수와 김민기, 양희은 풍의 가요들을 틀어주었다. 인천의 대학생들, 좀 젊은 문인들, 연극인들 그리고 외지에서 방학 때 귀향한 대학생들이 이 다방을 메웠다. 조금 더 문화적으로 연조가 깊은 젊은이들은 더 그윽한 것을 찾았다. 술집들이 그 욕구를 채워주었는데 꼭 가는 곳이 하인천역으로 넘어가는 곳의 잡어횟집, 인천여고 인근의 삼치구이집, 용동 큰우물집, 신포시장의 백항아리집, 옛 키네마 극장 뒤편 다복집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이나 손발짓이나 여러 행각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체득적인 정서나 감각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심하고 치밀한 감각이면서 또한 복합적으로 배어 들어간 감각이기도 했다. 그들은 막걸리와 함께 먹는 생선 몇 조각이 어떻게 말려져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구워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좀 곰삭고 찌든 맛이 있어야 한다.” 생선 맛에 대한 이들의 말이나 그것을 주장하느라 서로 간에 오갔던 손짓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음식 맛의 감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구현해야 할 자기 삶의 감각, 지역 감각 같은 것이었다.
필자에게 인천은 통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것들을 넘나드는 통로로 있었다. 집에서부터 인근 농촌을 거쳐 화교 동네까지, 집에서부터 동인천역을 지나 축현 학교까지, 자유공원 밑 길거리와 차이나타운까지, 철로를 따라 석바위 과수원을 거쳐 주안염전과 갯벌에 이르기까지 어릴 적의 장소 경험들,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도심 다방과 술집들에서의 장소와 사람 경험들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경험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천에서 형성되어 왔던,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인천의 지리적, 공간적 계열을 따라 문화 경험의 통로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에게 인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찾아 들어가고 부대끼며 체화시켰던 감각의 장소들이다. 그것은 한 곳에 단일하게 머무는 문화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들이 움직거리는 경험의 통로이다.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이 장소와 접하고 사람과 접하고 감각을 생성하는 접촉지대이다.
문화 중심이라는 말은 본래는 마치 가마솥이 끓듯 다양한 것들이 모여들고 접촉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지역문화를 뜻했다. 인천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다양한 문화의 통로, 길, 접촉지대로서, 그리고 그 곳에서 생성되는 감각들과 의미들을 가치로 바꾸어 생산해내는 문화생산의 처소로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인천은 그런 곳이다.
조경만 /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