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국제시장 골목 가운데 작게 보이는 간판, 성광떡집.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 곳 떡집은 시인이자 문화 활동가인 이종복 작가의 생활터전입니다. 오토바이로 신포동 일대를 오가며 따끈한 떡을 실어 나르는 떡집 사장님, 신포동에서 나고 자란 이종복 시인이 생각하는 인천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방앗간에서 떡을 빚으며 글을 쓰는 이종복 시인과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Q. 방앗간 사장님이자 문화 활동을 하는 시인이라고 해야 할 텐데요. 어디에 더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A. 부모님과 둘째 형님에 이어 방앗간을 물려받아 운영하는 떡집 사장이지만, 정체성은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응모해보기도 했는데 고배를 마셨죠. 그러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구연 시인을 만나면서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인천을 공부하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보낸 시절은 ‘죽음’이 아닌, ‘죽임’이 일상적인 시절이었어요. 사회 저변에 폭력이 일상화되면서 이에 대한 두려움도 컸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이나 돌출되는 감정들을 느꼈고, 이를 스스로 정화하고 내면을 다루는 방식을 찾다보니 ‘시’가 보였죠. 시(詩)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포괄적 내용을 집약하는 상징적인 장르에요. 그렇게 시인으로 활동한지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Q. 아버지와 형님에 이어 가업을 물려받으셨는데, 방앗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 조부의 당숙이 김대건 신부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안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인천으로 내려와야 했던 상황이었죠. 조부께서 그렇게 인천에 정착하셨고, 저의 아버지부터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오셨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아리를 구워 파는 일도 하셨는데, 1947년부터 방앗간을 시작하셨죠.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둘째 형님이 물려받았고, 잠시 일을 도와준다고 함께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네요. 그 해가 1988년인데, 방앗간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법학도였으니 사법고시를 준비했겠죠. 사실 어린 시절에는 집안 배경 탓에 신학과를 가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일반 대학을 진학하면서 법대를 가게 되었는데, 그 갈림길들이 매우 다른 삶을 만들었네요. 사실 방앗간을 이어받는다는 일이 어렵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서 해 오셨던 일이고, 제가 살아왔던 삶의 모든 부분이 방앗간과 함께 했던 터라 어색한 일도 아니었거든요.
Q.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에 신포동에 관한 기억은 다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신포동은 어떤 모습인가요?
A. 제가 태어나고 자란 신포동은 당시 인천에서 최고의 번화가이자 유일한 도심이었죠. 신포동과 동인천 일대만 벗어나도 인천은 논과 밭, 염전과 바다였어요. 송도, 화도진, 제물포, 주안… 지금이야 도심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과수원이나 염전, 허허벌판의 대지였으니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여기 신포동 인근 일대 뿐이었어요. 이 일대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문화를 가진 곳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외국인 선교사, 화교, 일본인이 한데 어우러져서 인종이나 문화적 괴리감도 없었으니까요.
Q. 그럼 그 당시 기억과 달라진 모습이 나타난 지점은 언제부터였나요?
A. 군대를 다녀왔을 때였어요. 강제징집으로 군대를 다녀왔는데, 작은 내무실 안에 전국 팔도에서 모인 청년들이 있었죠. 거기서 처음으로 인천이 아닌 전국의 지역을 만났어요. 제대하고 돌아오니 세상이 좀 달라지고 있었어요. 또 어린 시절에 보던 인천의 모습과 다른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죠. 어릴 때는 다양한 문화가 유연하게 흐르던 인천이었다면, 청년 시절에 보게 된 인천은 서울을 향해 치열하게 싸워가는 팔도 각지의 사람이 모인 지역이더군요. 이 모습을 보면서 지역의 문제, 인천의 정체성 등을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 문제가 저를 지금까지 오게 한 평생의 숙제가 되었어요.
Q. 인천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올해는 특히나 가치,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모습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요즘 인천이 가치 재창조라는 단어를 주목하면서 여러 사업들을 하고 있어요. 예컨대 과거의 인천 인물을 찾아내고, 이를 정리한다거나 인천의 외형에 주목하면서 섬을 비롯한 자연에 주목하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죠. 이런 사업들을 펼치면 인천 시민들에게 가치와 자존감이 자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긍심과 가치의 이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화적 경험과 양분을 주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사람’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인천의 정체성을 만들고 가치를 키우는 최우선적인 일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일은 시간이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는 거죠.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가는 과정을 문화적 관점으로 실행해야 하고, 그 과정을 사회적 약속을 통해 지켜야 합니다.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는 아직 시작 단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성급하게 움직이며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보다 조금 더 천천히 긴 호흡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봐요.
Q. 재단이 기부금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이제 정확히 1년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기부자의 입장에서 보시기에 아트레인 기부금사업을 평가하자면 어느 지점이 좀 더 보강되어야 할까요?
A. 인천문화재단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어떤 사업이 실행되는지 모두 다 보여요.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부 영역만큼은 일반적인 사업보다도 더 투명하게 외부로 노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부자가 몇 명이고, 현재 기부금이 얼마가 모였고, 어떤 사업에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은 돈이라도 기부를 한다는 건 그만큼 그 단체 혹은 기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의미거든요. 그런데 지금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에는 이런 정보들이 나와 있지 않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재단도 자랑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지, “우리가 이만큼 노력해서 문화예술을 위한 기부금을 이만큼 모으고 있고, 이런 사업에 쓰고 있습니다” 뻔뻔하다고 느껴질 만큼 보여줘야 해요. 물론 인력이 부족하고 사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은 이해해요. 하지만 방안을 강구하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트레인을 통해 모인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하는지, 특별히 생각하시는 지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아트레인의 기부금은 지원금을 받아 창작 활동을 하거나 수혜를 받고 있는 예술인이나 단체가 또 다른 지원의 영역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해요. 예술창작의 역량 평가 등 일반적인 지원사업의 기준과 잣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혜자를 발굴해서 문화예술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가 이 사업으로 수혜를 받았는지,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모든 부분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죠. 사업의 방식도 일반적인 공모 형태는 지양하길 바랍니다. 기부금을 낸다는 것은 누군가가 진심으로 단체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뜻이죠. 그만큼 소중하고 책임감 있게 쓰여야 하는 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업을 만드는 일은 어렵고 힘든 영역임이 분명하지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문화재단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언제나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종복 선생님과의 시간이었습니다. 말씀해주신 지점들을 실행 과정에 반영함으로써 기부자를 위한, 인천 시민을 위한 문화재단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어주신 이종복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성광방앗간(조선떡집)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3, 신포국제시장 내 위치
전화번호 : 032-772-5093
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