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쓸모없이, 대충 사는 ‘무민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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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박모 씨는 지난 연말 모임에서 짚신을 선물 받았습니다. 송년회 주제를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선물의 단골 아이템은 한물간 제품들입니다. 2019년을 앞두고 2018년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주거나 주차금지 표지판, 보도블록, 인공 잔디, 업소용 현관 발판, 버스 손잡이 등 일상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건네는 식이죠. 스마트폰이 아닌 일반 휴대전화 충전기, 짚신, 굴렁쇠 등 시기가 지난 제품도 ‘쓸모없는 교환식’에서는 쓸모가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쓸모없는선물’ 해시태그를 검색한 모습
출처:MNB

청년들은 왜 쓰지 못하는 선물에 열광할까요. 값지거나 유용한 것을 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재미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저렴하면서도 폼 나는 ‘가성비 갑’인 선물은 좀처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쓸모를 버리는 방식’을 택하는 겁니다. 이들은 선물의 상한선을 정한 뒤 해당 가격대에 맞는 것을 골라옵니다.

전문가들은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을 ‘무민세대’의 놀이 문화로 분석합니다. 무민세대는 무(無‧없을 무)와 민(mean‧의미하다)의 합성어로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젊은 층을 지칭하는 신조어입니다. 극심한 경쟁과 피로에 지친 청년들이 의미 없는 행위에서 위안을 얻는 거죠. 이들 세대는 선물의 가치가 쓸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실용성은 떨어져도 웃음과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직장인 A씨의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 모습
출처:MNB

무민세대는 지난해 유행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사뭇 다른데, ‘소확행’이 일상을 유지한 채 경험과 물건으로 삶의 질을 높인다면, ‘무민세대’는 생활의 일부 혹은 전체를 내려놓거나 버리겠다는 모양새를 취합니다. 전자가 삶의 질을 높이는 부가가치라면 후자에는 마이너스적인 삶을 통해 지향점을 바꾸겠다는 반전의 메시지가 담겨 있죠. 무민세대는 한국 사회에 지상 명제처럼 자리 잡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생각이 ‘대충 살자’입니다. 최근 2, 30대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너무 열심히, 지나치게 경쟁하지 말고 그저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하자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유머와 대중문화의 일부로 활용되면서 젊은 세대의 달라진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충 살자’ 시리즈는 높은음자리표를 지나치게 축약해 그린 베토벤의 악보를 보고 “대충 살자, 베토벤의 높은음자리표처럼”이라고 하거나 관자놀이에 헤드폰을 낀 캐릭터 아서를 보고 “대충 살자, 귀가 있어도 관자놀이로 노래 듣는 아서처럼”이라고 말합니다. 이밖에 “대충 살자, 숫자 풍선 들기 귀찮아서 머리에 낀 황정민처럼” “대충 살자, 걷기 귀찮아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북극곰처럼”, “대충 살자, 하우스 지붕에 누워서 자는 고양이처럼” 등 수많은 ‘짤’이 있습니다.

 

출처:다음 카페 ‘안밤 TV가 빛나는 밤에’

카카오톡에서는 대충 그린 듯한 이모티콘이 인기입니다. 이런 걸 돈 주고 사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서 같은 것도 있습니다. ‘대충하는 답장’ 묶음은 그림판으로 그린 듯한 얇은 선으로 사람의 상반신을 그리고 표정만 다르게 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 출시한 범고래 작가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수억 연봉의 스타 작가가 됐죠.

서점가에도 변화는 찾아왔습니다. 김신회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손힘찬의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등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완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출간 6개월 만에 14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외에도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힘 빼기의 기술』, 『빵 고르듯 살고 싶다』, 『한 번 까불어보겠습니다』 등이 열띤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대충’의 가치관은 드라마 소재로도 등장합니다. 웹드라마 ‘사랑병도 반환이 되나요?’는 세상의 부조리에 발끈하며 열정을 갖고 사는 먹방 BJ 발끈 언니와 의욕 없이 사는 대충살자 TV 운영자 슈렉을 다룬 작품입니다. 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의 박선호는 여전히 ‘대충 살자’는 캐릭터로 출연하고 있고요.

출처:세계일보

20·30세대에 만연한 ‘대충 살자’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과 체념에서 탄생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세계, 끝없는 열정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일종의 포기를 선택한 거죠. 이룰 게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허무주의로 비칠 수 있지만, 이들 세대의 ‘대충’은 사회의 틀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기보다 다른 삶을 좇는 재충전에 더 가깝습니다.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로 인기를 끈 하완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운이 좋은 시대를 사는 세대가 있는 반면, 지금처럼 운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야 할 힘든 시대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 내고 있다. 그들 스스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맞는 희망이 바로 거기에 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베트남,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 미국, 멕시코, 쿠바, 아이슬란드, 스페인 등을 여행한 손모 씨(31.여)는 “대충 살지 않기 위해 떠났다, 지금은 꿈을 다시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나이가 정해져 있는지 의문이 생겨요. 누구랑 만나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나요? 누군가에게는 대책 없이 대충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대충 살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온 날들이 힘들기는 했어도 헛된 시간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시간들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 여행 또한 나를 만든 날들의 연장선일 뿐이에요. 잘하거나 잘못했다고 평가할 만한 가치가 될 수는 없죠.”

직장인 최모 씨는 “한 번도 대충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대충 살자 시리즈를 보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며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열심히만 살아왔는데 완벽하지 않은 사진이나 상황을 보면 ‘조금은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 조금 위안이 된다”고 털어놓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국의 2,30대는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며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출처:한국일보

전문가들은 대충 살자 시리즈가 청년 세대의 새로운 언어라고 분석합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대표되는 위로 담론과 달리 대충 살자 시리즈는 젊은이들의 자조나 해학에 가깝다며 “요즘 청년들은 몇 년 전 청년들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부조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풍자 등의 방식으로 꼬집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는 “열심히 살아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얻어낸 게 결국 ‘생존’뿐이란 걸 깨달은 청년들이 자신을 경쟁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작은 행복이라도 찾으려 하는 시도”라고 평가합니다.

올해 초 취업포털 사람인이 성인남녀 1,1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 세대 절반 정도가 자신을 무민 세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0대는 그 비율이 47.9%, 30대는 44.8%였죠. 무민 세대가 된 이유로는 ‘취업, 직장생활 등 치열한 삶에 지쳐서’(60.5%·복수 응답)란 응답이, 무민 세대 등장 원인으로는 ‘수저 계급 등 개선 불가능한 사회구조’(57.4%·복수 응답)가 가장 많았습니다.

출처:세계일보

올 7월 글로벌 헬스 서비스 기업 시그나그룹은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스트레스는 주요국 최고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중국, 인도 등 23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한국의 웰빙지수는 51.7점으로 23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ASMR을 들어야만 잠을 자고, 장난감을 손에 쥐어야 안정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슬픈 열풍’일지 모릅니다.

글·이미지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대충 삽시다] ① ‘무민(無mean)세대’ 새로운 가치관…“대충 살자”
헤럴드경제, 2019.1.3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대충 삽시다] ③ 허무주의 vs 재충전, ‘대충 살자’의 진짜 의미
헤럴드경제, 2019.1.3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경쟁에 지친 청춘들을 응원합니다”
파이낸셜뉴스, 2019.1.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무민세대’의 놀이문화… 쓸모없는 선물 교환하며 “해피뉴이어”[줌인톡]
머니S MNB, 2018.12.2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아프니까 청춘’ 언제까지?…무민세대의 외침 ‘대충 살자’ [S스토리]
세계일보, 2018.10.2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6. 한국 2030 절반이 ‘무민 세대’인 이유
한국일보, 2018.10.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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