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 오래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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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문화적 가치란 무엇일까?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원고를 요청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천의 구도심이었다. 문화란 단어는 관련 분야에 따라서 수백 개의 다양한 단어와 형태들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건축과 도시를 10년 가까이 공부한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장소와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적인 관점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오래된 장소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인천의 구도심이 가지는 문화적 가치를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한다.

인천에 살았지만 제물포역부터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구도심 지역이 익숙한 동네는 아니었다. 하지만 구도심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수봉공원에서 어지러운 다람쥐 통을 타며 깔깔거리고, 대관람차를 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며 설레었던 기억, 그리고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동생과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흐릿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비교적 기억이 선명한 중학생 시절엔 15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동네로 남아있다. 그 후 상권이 빠르게 변하면서 우리들의 핫플레이스는 동인천에서 주안으로, 또 부평으로, 다음은 구월동으로 변했고,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도 이 흐름에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그 후로 제물포, 동인천, 월미도와 차이나타운은 그저 낙후된 동네, 집에서 먼 동네라는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 인천의 구도심은 더 멀어졌다. 그러다 2008년, 인천도시설계대전에 참여하면서 이곳을 다시 찾게 됐다. 당시 대상지였던 제물포 역세권을 조사하던 처음에는 그저 도로를 따라 빼곡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늘어선 건물 틈 사이로 들어가자 건물로 둘러쌓인 넓은 중정이 있는 구조라는 것을 발견했고, 오래되었지만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나는 물론이고 당시 같은 팀이었던 친구들도 모두 감탄했었다. 오래된 지역에 남아 있는 건축물들이 박제한 시간의 매력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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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서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구도심 개발 계획이 적은 편이다. 인천의 주거지는 점점 서울 쪽으로, 또 새로이 간척된 땅에 ‘OO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이동되었고, 서울에서 먼 곳은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비활성화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려한 ‘OO신도시’의 모습보다는 이 비활성화된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인천의 모습에 가치를 두고 싶다. 화려한 도시를 흉내낸 모습이 아닌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버려지고 혹은 방치되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된다. 지역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오래된 것에 대한 인식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은 아닐까?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오래된 것의 매력과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빈티지와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근대 유산에 대한 관심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옛 창고를 개조한 붉은 벽돌의 조적식 건물과 세월이 담긴 타일 건물, 차이나타운의 중국풍 건물, 옛 일본 조계지의 유럽식, 일본식 건물들, 이렇게 여러 문화들이 혼재되어 있는 이 지역이 항구와 수도 사이에서 그동안 담아온 인천의 문화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개선’이라는 단어로 이 지역을 통일된 어떠한 것으로 성급하게 정리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재되어 있어 정의하기 쉽지 않은 모호함이 이곳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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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과 차이나타운이 각종 촬영과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들이 지역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등 여러 시도들이 축적되고, 예술을 매개로 재미있는 공방들과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 이 동네가 지금처럼 지역 사람들이 천천히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민간 기업이나 관에서 만드는 계획들이 매력을 갖춰가고 있는 이 거리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앞당기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면 고장난 장치에 붙어있는 안내문구가 눈에 띈다. ‘조금 늦더라도…제대로 고치겠습니다.’ 물론 많은 예산과 계획이 투입되면 빠르게 눈에 띄는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장소는 지역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고쳐가는 것이 제대로 된 지역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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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바쁘다는 핑계로 뜸했던 인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늦은 시간 만난 중학교 동창 친구들과 한밤중에 동인천으로 달려왔다. 이국적인 건물들을 조명으로 밝힌 한적한 거리를 천천히 산책을 하고 나니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오래된 친구들과 오래된 장소로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것 같다고….

인천 시민들이 각자 간직해왔던 자신만의 오래된 장소와 기억들이 인천의 기억과 가치로 연결되어 기분 좋은 공감으로 계속 남아있었으면 한다.

구아영 / 서울연구원 도시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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