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牧場) 하면 떠오르는 곳이 바로 제주이다. 한라산의 중산간지대 드넓은 대지에 펼쳐진 목장과 뛰어다니는 말떼는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제주도의 대표적인 문화 이미지이다. 전근대(前近代)시기 말은 국방, 교통, 운송, 교역 등 다양한 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가축이었다. 특히 도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은 “군국(軍國) 사무(事務)” 즉 “나라를 지키는 일과 같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강화도에도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시대 강화도는 제주를 제외한 전국의 130여 목장 중 이름난 곳이었다. 강화에 처음 목장이 생긴 것은 기록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몽골과의 화친 이후 개경에서 가까운 강화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목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는 제주만큼 따뜻하지 않아 겨울철 말에게 먹을 건초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도성과 가까워 위급 시 말의 수송이 편리하고 상시적인 관리가 쉽다는 점, 물과 풀이 풍부해 말 사육에 적합했던 점 등은 강화 목장 설치의 근거가 되었다.
강화도의 목장은 태조 이성계가 탔다는 ‘사자황(獅子黃)’과 효종 대 전략적으로 길렀던 ‘벌대총(伐大驄)’의 산지로 유명했다. 아울러 강화도의 각 목장에는 말뿐만 아니라 소나 양, 염소 등과 같은 가축을 기르기도 했으며 그 규모도 상당했다. 하지만 강화의 목장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축소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경제 상황에서 목장의 운영보다 백성의 곤궁한 삶을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화의 목장은 농경지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폐지된다.
벌대총을 기른 진강목장의 석축 담장(ⓒ인천시립박물관)
현재 강화도에는 진강목장(양도면), 길상목장(길상면), 북일곶목장(화도면), 매음목장(삼산면)만이 그 흔적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두꺼운 목장의 석축 담장이 우뚝 솟아 있는 제주도의 말목장과는 달리 방치되어 훼손되어 가고 있다. 이제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강화도 목장유적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목장의 흔적이 남은 곳에 안내판이라도 세웠으면 좋을 듯하다.
그 옛날 사자황과 벌대총이 뛰어놀던 강화도의 목장은 이제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인천 시민께 그 흔적이라도 알려 강화의 또 다른 문화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정민섭(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