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들며 인천에 정주하다

0
image_pdfimage_print

1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다. 2002년에 인천으로 이사왔다. 이사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비싼 집세 때문에 서울에서 쫓겨 온 것이었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인천에서 살았지만 내가 사는 곳이 ‘인천’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인천은 공기는 나빠도 집세가 싸고 무엇보다 서울 가는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인천은 나에게 ‘서울과 가까운 곳’이었다. 동암역을 인천의 첫 집으로 선택한 것은 직통열차 때문이었다. 하지만 3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인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인천에서 만든 첫 번째 단편영화는 [파마]다. 인천에서 만난 한 베트남 여성 이야기다. 남구학산문화원에서 운영했던 이주여성 교육 프로그램에서 만난 여성이었고, 촬영 장소는 집 앞 미용실이었다.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시나리오를 쓰다가 잘 안 풀리면 미용실에 가서 앞머리도 자르고 하면서 관찰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배우들 중에는 실버극단 <학산>(남구학산문화원에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던 노인극단) 단원이 있었다. ‘예술 교육이 창작에 연결되니 좋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을 뿐이다.

3

인천에서 만든 두 번째 단편영화는 [결혼전야]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살았던 내 이야기다. 하지만 굳이 서울에서 찍을 이유가 없었다. 인천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을 받았다. 배우도 실버극단 <학산>의 단원이었다. 촬영 장소도 그 분의 집, 인천시 남구 도화동이었다. 첫 영화 [파마] 때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스탭 상당수가 인천 사람들로 채워졌다는 것. 인천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인천에서 함께 작업할 동료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온 스탭들의 숙소는 인천의 종교단체에서 지원해주었다. 인천여성영화제와 인천독립영화협회의 도움도 받았다. ‘나는 인천에서 영화를 찍고 있구나’ 생각했다.

4

인천에서 만든 세 번째 단편영화는 [천막]이다.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421-1. 지금은 가스충전소가 있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기타 공장이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천막을 치고 복직농성 중이다. 이분들을 처음 만난 곳은 2012년 인천노동문화제가 열렸던 부평공원이었다. 이후로 꾸준히 관심을 가지다가 함께 단편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했고, 스탭들 중 상당수가 인천독립영화협회 회원들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이 배우로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스탭들의 숙소는 이분들과 연대하는 종교단체에서 지원했다. 인천의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에서 보조 출연을 해줬고, 노동운동단체에서는 소품을 지원했다. 인천여성영화제에서는 밥을 해왔고, 인천독립영화협회 회원들이 음료를 들고 촬영장을 찾아왔다. 

나는 서울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비싼 집세를 피해 인천에서 당분간 살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인천이 잠시 비를 피해 있다가 떠날 ‘천막’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단편영화 [천막]을 만들면서 비로소 내가 ‘인천에 정주(定住)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일, 인천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인천에 사니까 인천에 관심을 가져야 해.’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인천에 살다보니 함께 사는 이웃들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를 이웃들과 함께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영화를 이웃들과 함께 볼 수도 있었다. 내가 찾는 ‘인천의 이야기’는 인천만의 것이 아니다. TV 교양프로그램에 나오는 지역 특산품 같은 것들을 소개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웃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으려고 한다. 인천이라는 구체적인 도시에서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를 찾고 싶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인천에 사는 창작자들이 이웃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제도들이 좀 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인천의 창작자들이 스스로 고립되지 않도록 인천에서 동료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글, 사진/ 이란희(영화감독, 배우, 예술교육자)

Share.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