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곶돈대 홍예문
연미정에 가기 위해 차를 주차하고 별 기대 없이 약간의 언덕을 올라갔다. 월곶돈대 홍예문을 들어서자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정자와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그것이다. 시원한 풍광 너머로 연미정에 올라 바라보는 조강은 쓸쓸하고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나가는 곳에 있다. 그 모습이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지금이야 북한과 가까워 저 바다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이곳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세곡을 실은 배들이 바로 연미정 아래 정박하여 조수를 기다렸다 출발하곤 했던 곳이니 얼마나 왁자지껄했을까. 그 뱃사람들의 모습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만 남았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고려 고종 31년(1244)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冑)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모아 연미정에서 하과(夏課:여름 공부)를 하고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최소 770년 전에도 연미정의 여름은 공부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던 듯하다. 지금도 더운 여름날 연미정에 오르면 느티나무의 그늘과 북녘에서 불어오는 산들산들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조선시대 부산포, 내이포, 염포에 설치한 왜관에서 일본 거류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삼포왜란) 그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황형에게 연미정을 하사했다. 지금도 그 인연으로 황 씨문중이 이곳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또 정묘호란 때는 금나라 부장 유해(劉海)가 바로 이 연미정에서 조선과 화친하였다. 연미정은 그곳에서 역사의 영화와 치욕을 모두 겪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대로여서 더욱 마음이 쓰이는지 모른다.
지금은 한강과 임진강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만이 자유로이 이곳 앞을 지날 수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시끌벅적 붐비던 연미정을 상상해 보며 다시 그 영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미정과 느티나무
글·사진 / 홍인희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