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큐레이션(2016.07.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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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정기휴관일, 모두 닫힘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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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예술인도 쉰다’. 생산적인 일로 방학의 하루를 채워보자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곳곳에서 ‘월요일은 정기휴관’이라는 문구와 마주한다. 20대 언론 ‘고함20’, 대학생 기자의 월요일 하루를 따라가 본다. 부암동의 서울미술관도 윤동주 문학관도 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닫았다. 세종대왕 동상 아래 ‘세종이야기’도 월요일에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미처 모르고 나왔다. 더위에 몸은 지치지만 누구 탓도 아니다. 다행히 시민청은 열려 있었다. 시민들이 찍은 한강 사진전, 시민이 참여해서 바꾸거나 꾸밀 수 있는 ‘사물을 읽다’전 관람.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났지만 기자는 ‘월요일이라고 모두 닫힘은 아님’을 깨닫고 그 속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맛본다. 예술은 특정 요일에 특별히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잠깐 앉았던 공기침대도 그에게는 예술이었다.

포스트잇 추모가 불러낸 ‘정동(情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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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진보적 지식 담론 영역에서 ‘정동(affect)’이라는 용어가 자주 출현하고 있다. ‘정서’와 다르고 ‘감정’이라는 단어와도 다른 정동은 ‘공기 중에 있는 어떤 것(something in the air)’으로 모호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문화과학>이 ‘정동과 이데올로기’라는 여름호 특집을 발간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한계가 있다지만 ‘정동’이 한국사회의 연구주제로 빠르게 떠도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괴한 작동 방식이나 내면 분석, 미래의 가능성을 응시하려는 이론적 갈증”에 정동이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 세월호와 강남역, 구의역이 불러낸 ‘정동적 힘’이 지속의 방식으로 깊이 끓길 바란다.

포켓몬 고, 스토리가 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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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스터는 달랐다. 초등생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유년의 비밀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을 그린 명작이었다. 아이들은 만화 속 괴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어른이 주인인 사회에서 타자로서 존재하는 인물. 이인화 교수는 ‘포켓몬 고’ 게임의 인기를 스토리에서 찾는다. 모바일, 위치기반, 증강현실, 지적재산권의 융합이 게임을 탄생시켰지만 본질은 스토리에 있다는 것. 이제 게임 작가는 가상과 실제의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며 ‘방대한 혼합 현실의 설계사’가 된다. 게임에 문외한인 탓에 “어떤 게임의 위대함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위대함이다. 게임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게 만들고 사이좋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진부해서가 아니라 ‘너무 핫해서(뜨거워서)’ 종종 놓칠 수밖에 없는 창조성이라는 단어가 위대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포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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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난 전시지만 의미 있는 작업인 것 같아서 소개한다.(지난 7월 22일부터 3일간 열렸다) 매향리의 연습용 포탄과 탄피로 만든 천여 점의 조각상이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으로 서울광장에서 소개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기도 했던 김서경, 김운성 부부조각가의 작품이다. 매향리는 주한미군의 공군폭격 훈련장이 있던 곳이다. 장기 투쟁 끝에 2005년 폐쇄되었지만 아직도 수십만 발의 포탄이 쌓여 있다. 포탄에서 새싹이 피어나고, 나비가 앉는다. 붙어있는 두 포탄이 키스를 한다. 다양한 글자가 새겨져있기도 한데 그 중에는 ‘死드’도 있다. 올해로 정전협정 63주년을 맞았지만 이 땅은 아직 평화롭지 않다. “우리 안에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을 걷어내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평화선언을 해야 합니다.” 2백여 점의 작품은 마을에 기증하고 남은 8백여 점은 지자체와 상의 후 상설전시장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5고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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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의 기억’. ‘곱다’는 뜻의 그 고운이 아니다. ‘고운’은 고등학생 운동의 준말. 고등학생 신분으로 매주 시위에 나가고, 전교조 소속 해직교사를 위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민주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유인물을 뿌리다 학교에서 쫓겨났던 고등학생들이 사반 세기만에 만났다. 하명희, 박명균 두 작가가 1990년대 고교생 운동을 다룬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와 <나는 언제나 술래>라는 책으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어른들이 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했던 것이다. 고교 시절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한다는 것은 우리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내 삶에서 가장 좋은 자양분을 얻었던 때가 그 시절임을 깨달았다.” 고운을 했든 안 했든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 ‘고운 세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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