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球都) 인천’, 그 자부심에 덧붙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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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 근대문화의 발상지이며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근대적인 외교와 무역이 시작된 곳이고, 그래서 근대 초기의 건축과 음식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야구 역시 인천의 그런 특성과 내력이 낳은 한 가지 산물이다. 선교사 질레트(한국명 길예태)가 YMCA 서울지부의 청년들을 모아서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을 만들고 외국어학교 학생팀과 성동원두(훗날 동대문운동장. 오늘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터)에서 경기를 벌였던 1904년 무렵이 공인된 한국야구역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수입되기 이전부터 부두와 외국인 주거지역 근처 공터 곳곳에서 미국인 병사들과 일본인 학생들에 의해 야구가 시작된 것도 인천이었고, 본격적으로 야구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인천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개 근대문화란 빛인 동시에 어둠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식민지로 전락해가며 전통문화를 강제 폐기당하던 시절의 흔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근대적인 복식문화란 ‘단발령’이라는 문화적 폭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근대적인 여행문화란 ‘철도부설’이라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듯 말이다.
야구 역시 외세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야구라는 것 역시 원래 미국에서 시작된 공놀이고, 일본 사람들이 일찍부터 즐겼던 스포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어지간한 다른 문화들과 달리, 한국에서 야구만큼은 굴종 대신 저항 속에서 싹을 틔웠고, 막연한 추종보다는 자발적인 열기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황성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3.1운동을 벌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안팎에 과시하는 숨가쁜 세월을 막 지났을 무렵, 인천에서 ‘한용단(漢勇團 : 용감한 남자들이라는 뜻)’이라는 한국인 학생야구단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주말마다 인천항 근처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이라는 곳에서 일본인 학생이나 직장인들로 구성된 팀과 경기를 벌이곤 했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관전하곤 했다. 황성 YMCA 야구단의 경기가 열리던 성동원두에 모인 사람들이 오직 신기한 서양식 공놀이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다면, 한용단의 경기가 열리던 웃터골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드디어 응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용단은 일본인 야구팀과 종종 야구대결을 벌였고, 한용단을 응원하는 것은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용단이 결국 일본인 팀과의 경기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한 역전패를 당했을 때 한국인 관중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했던 사건 때문에 강제 해산됐다거나, 해체된 한용단의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고려야구단’이라는 팀을 재결성해 해방 이전 한국 야구사에 민족적인 흐름을 이어간 자세한 사정을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만 인천은 단지 야구가 처음 전해지고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 야구라는 서양문화를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문화로 승화시킨 곳이라는 점을 짚고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 야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스포츠이며, 가장 많은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분야다. 하지만 만약 그 역사를 더듬어갈수록 낯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족보를 가진 것이었다면 어쨌을까, 생각해볼수록 아찔하고 그래서 참 다행스럽다.
‘구도(球都)인천’. 그 네 글자는 인천에 살면서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가지는 한 가지 자부심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 안에 혹 ‘야구가 처음 도입된 곳’이라거나 ‘50년대와 60년대에 국내 최강의 야구팀을 가졌던 곳’이라는 의미만을 담아두었던 이들이 있다면, 한두 가지쯤 더해줄 필요가 있다. 이곳 인천은 한국인들이 비로소 야구라는 낯선 공놀이를 즐기기 시작한 곳이며, 후대의 야구팬들 역시 그것을 당당하게 즐길 수 있게끔 해준 곳이라는 뜻 말이다.

글 / 김은식(작가,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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