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항장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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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인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및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동경 시나가와 구(品川区) 신반바 역(新馬場駅) 인근에서 마츠리(祭り)가 열리고 있다. 마츠리는 열리는 계절마다 의미가 다른 종교적 의식이다. 가을의 마츠리는 추수하기 전에 오는 태풍을 잠재워 보내려고 사흘간 춤추며 밤을 지새우는 신앙의식이다. 사진ⓒ노기훈

자전거를 타고 다시 요코하마(橫濱)로 돌아오는 밤길은 여러 가지로 고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차역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정차장을 살펴보았다. 그곳은 신바시 정차장을 재건축한 철도역사전시실이었다. 근대식 은빛 연와로 마감한 건물은 조명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한밤중인데도 시오도메(汐留)의 높은 빌딩숲 사이에서 운치 있게 빛났다. 2층에 지나지 않는 신바시 정차장은 열차 한 량 정도 길이만 남은 최초의 철로를 유리관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최초라는 명성에서 유추할 수 있는 넓고 깊은 스케일에 비해 현시점에 볼 수 있는 역사(驛舍)는 이미 역사(歷史)가 되어버린 중후함에 비해 작고 초라했다. 그곳은 탐미적이고 과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 단지 신바시 정차장의 외관을 본래와 같은 장소에 최대한 꾸밈없이 재현해 놓는다는데 초점을 맞춘 듯했다. 일본 최초의 역사를 재현해 놓았으니 어느 쪽이나 구 서울역보다는 장엄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넓이와 높이 모든 면에서 구 서울역에 비하면 헤비급과 라이트급 차이였다.

1872년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역사인 신바시 정차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철도역사전시실이다. 1층 전시실 바닥을 유리로 깔아 개업 당시의 기초석 일부를 관람 할 수 있다. 사진ⓒ노기훈

그런데 골똘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쪽 계열에서는 크기가 작고 너절한 것이 모더니스트들이 상상력을 발휘했던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정취가 있어서, 생각하기에 따라 보다 깊은 풍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이라인이 화려한 마천루와 나란히 놓인 구시대의 유물을 보면서 단지 건축물의 크기만으로 같은 링 위에 올리는 건 공정치 못한 승부 같았다. 내가 상상하던 19세기 후반 신바시 정차장의 상징은 중세에서 근대로 시공간의 축을 본격적으로 바꾸면서, 칼과 주인이 있던 봉건시대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 메이지 시대의 맥락으로 이동시킨 신문물이었다. 그 와중에 기차는 요코하마로 달리는 매 순간 매캐한 연독(煙毒)을 씩씩거리면서 질주하는, 그야말로 근대적인 ‘컬처쇼크’였다. 역과 역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기차로 인한 최초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낭만을 선물하던 신바시 정차장은 급격하게 팽창하는 20세기 과학기술사의 진보를 지나며 최초라는 훈장만 남기고 사라져야 했다. 신바시 정차장은 곧 국제도시로 성장한 동경에 걸맞은 세련된 도회지의 풍속을 건축물에 녹아낸 JR신바시역에게 명패를 빼앗겼다. 그 쓸쓸한 영주의 퇴장을 지켜보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낡고 오래된 것들은 쉽사리 아스러져 잊혀졌다. 그나마 신바시 정차장과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들은 예우가 좋은 편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간 수많은 구시대의 잔해들을 어떻게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아카렌가(赤レンガ) 창고는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초기까지 요코하마 항의 창고로 이용되었다. 격동의 20세기를 뚫고2002년 당시의 모습을 남긴 채 문화, 상업 시설로 다시 태어났다.”라고 공식 홈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2017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메인 전시장으로도 활용된 아카렌가 창고는 1층을 아트숍으로 꾸미고 2,3층을 이용해 미디어 작품을 선보였다. 사진ⓒ노기훈

요코하마를 둘러보고 부러웠던 지점은 강자로 살아온 나라가 역사를 보존해 나가는 일종의 우월감이었다. 인천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2013년, 인천 개항장에 도착한 나는 인천 개항장 투어를 신청했다. 인천을 설명하던 문화해설사가 인천개항박물관을 가리키며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근대적 양식의 건축입니다.”라고 이야기 한 건축물들과 양식은 흡사하지만 크기에 있어서는 족히 5배는 뻥튀기한 건축물들이 요코하마 구도심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믿기 힘들지만 100년이 넘은 건물의 내부는 기적에 가까운 리모델링이 이루어져 지금도 주화를 관리하거나 미디어 아트를 교육하는 대학기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코하마 구시가지 쪽에 있는 근대식 건물들을 보면서 장막에 갇혀있던 어느 건축물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불투명도를 높여 형상을 갖추면서 알싸한 감정이 일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에게 요코하마에서 보는 건축물들은 잊었던 뭔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건 바로 1993년 시작된 문민정부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추진한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이었다.

1995년 8월에 첨탑 제거로 시작된 조선총독부 철거는 1996년 12월 대회의실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완료됐다.
사진출처: MBC 뉴스 동영상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건축물’의 정의는 ‘토지에 정착하는 공작물 중 지붕과 기둥, 또는 벽이 있는 것과 이에 부수되는 시설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시멘트 덩어리가 시간의 풍파를 켜켜이 쌓아가고 있는 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피아식별에 따라, 피동이냐 자동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시의 곳곳에서 흘러간 것들을 추억할 수 있는 단서를 채택할 것이냐 인멸할 것이냐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사안이다. 그럼 강자들은 어떻게 당당하게 자신들의 유산-건축물을 합법적으로 상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요코하마 개항기념관은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시민 기부금으로 1917년 준공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전소되어 1927년에 재건축되었다. 사진ⓒ노기훈

 내가 요코하마에서 작업실로 쓰고 있는 ‘BankART스튜디오 NYK’는 인천으로 치자면 아트플랫폼이 속한 개항장 지역과 유사점이 많은 요코하마 간나이(館内)에 지역에 있다. 요코하마는 에도(현 도쿄)시대 말기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항만도시로 발전했다. 인구가 부산광역시보다 조금 많다고 하면 도시 규모 면에서 이해가 쉬울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의 짧은 경험으로 비춰보건대 도쿄와 요코하마는 서울과 인천과의 관계와 흡사한 점이 많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구별문화통신 1호에서 했기 때문에 패스. 몇몇 유사성으로 판단에 이르는 건 독단에 가깝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감으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혀가 짧고 뇌가 정리되지 않은 예술가적 영역으로 남겨주시길. (그러고보면 괜찮은 작가들은 예술가적 감각을 기초로 하고 최종 목적지를 이미지로 해서 이걸 논리적으로 구현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단, 성공적으로)

1859년 미일 수호 통상조약으로 개항한 요코하마는 서양문물이 관동지방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써 세계가 요동치던 당시 개항만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문제는 100년이 넘게 지나서도 개항시기에 다져진 인프라와 자의식만으로 버텼다는 것이다. 요코하마시는 닛케이 지수가 나날이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던 70년대 말에 들어서야 낡고 쇠락한 요코하마의 도시 이미지에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낭만과 역사가 있는…’이라고 둘러대기에는 다가올 21세기의 국제도시로서 출항할 동력이 부족했다. 이러한 고민에 따라 요코하마시는 21세기 미래의 항구도시 프로젝트, 즉 ‘미나토미라이 21(MinatoMirai21)’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조선 부지와 부두에 국한되어 있던 구도심 지역을 문화 관광지로 개발하여 하드웨어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요코하마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에서 ‘미나토미라이21’이라는 이름이 결정되었다. 일본어로 미나토(港)는 항구, 미라이(未來)는 미래라는 뜻이다. 사진ⓒ노기훈

몸이 만들어졌으면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 근육질 몸에 아무 옷이나 입을 수는 없다. 요코하마시는 ‘미나토미라이 21’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2004년, 시민의 주체적인 참가와 창조활동의 핵심인 예술가들의 결집을 촉구하여 문화예술 창조도시로서의 변모를 골조로 하는 ‘창조도시 요코하마(Creative City Yokohama)’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 이 창조 패키지에서 ‘어려울 때일수록 문화예술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구동된 프로그램이 바로 ‘뱅크아트(BankART) 1929’와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메인 전시장인 요코하마 미술관 1층 내부의 모습이다. 2001년부터 시작한 트리엔날레는 올해로 6회째를 맞이했다. 이번 주제는 ‘섬과 별자리와 갈라파고스’로 상반된 가치관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의 모습을 살펴봤다. 사진ⓒ노기훈

드디어 뱅크아트까지 왔다. 뱅크아트를 소개하기 위해서 지면을 이만큼 할애했다. 여기서는 정책적인 의사결정이나 기타 문화예술도시로 변모 과정 등은 글의 성격상 관련 전문가들에게 남겨두기로 하고 나의 직분에 맡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는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 이야기만 해보겠다.

 뱅크아트는 예상대로 Bank(은행)과 ART(아트)의 합성어다. 그리고 1929도 서기 1929년이다. ‘뱅크아트 1929’는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안에 들어서고 3년 뒤인 1929년에 요코하마 개항장 주변에 건설된 구 후지은행과 구 제일은행 등 근대 석조 건물을 문화예술 활동 기지로 활용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은행’과 ‘1929’를 전면에 내세운다. 

일본은 한국정부가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자신들이 그걸 그대로 옮겨가겠다고 제안했다. 이제 막 올림픽을 치러낸 GDP 만달러도 안되는 한국인의 입장으로 봤을 때 ‘경제 대국인 일본도 당장에 급하고 보니까 일단 아무 말이라도 하고 보네’라고 허언에 가까운 실언이라고 혀를 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도 조선총독부 첨탑이 내려앉은 1995년 바로 그 해에 요코하마에 있는 어느 한 오래된 건물이 정말 여기서 저기로 장기알 옮기듯 이동하게 된다. 

때는 1929년, 뉴욕주식거래소의 전례 없는 대폭락으로 시작된 전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이 몰아 닥치고 역사의 장난인지 돈 없어 망하겠다는 그 해에 혈세를 모아 MOMA(뉴욕현대미술관)가 건립된다. 동시에 요코하마에는 고대 로마의 신전 양식으로 건축된 제일은행 요코하마 지점이 들어선다. 그리고 60여 년이 흐른 1995년, 구 제일은행 요코하마 지점이 마치 한 량의 기차가 되어 바사미치(馬車道)에서 미나토미라이(港未來)까지 놓인 철길에 미끄러져 120m를 이동하게 된다. 

구 제일은행이 미나토미라이 방면으로 옮겨가고 있다. 전체 제일은행 건물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발코니만 이동한 모습이다. 사진출처: 광주광역시 공식블로그

 요코하마시는 아이랜드 타워의 일부로 재현된 구 제일은행을 ‘YCC(Yokohama Creative Center) 요코하마 창조도시센터’로 전환해 예술가들의 활동공간으로 지원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외관을 뽐내는 역사적 건축물의 주인을 당당히 예술가들의 몫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강자로 살아온 국가가 건설한 역사적 건축물이나 항만시설, 창고 등은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하여 도심부 재생의 거점이 되었다.

반면, 일제강점기 건물인 조선총독부는 우리 땅 위에 새긴 주홍글씨와도 같았다. 얼마나 싫었던지 조선총독부 철거 당시 나라의 수장이던 김영삼 대통령 조차 공식 인터뷰에서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고 외교적 참사에 가까운 폭탄 발언으로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내가 있는 곳은 바로 그 ‘창조도시 요코하마’라는 구호 아래에 예술가의 거점으로 리모델링한 두 곳 중 하나다. 레지던시와 큰 관련이 없는 곳이 구 후지은행과 구 제일은행을 개조한 ‘뱅크아트1929 요코하마’이고, 레지던시 활동의 본거지가 일본 우편선(郵船) 창고를 개조한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이다.

요코하마시는 운영주체를 공모하여 무상임대로  NPO 민간법인에 위탁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운영한다. 이와 관련한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의 주요 활동은 전시기획과 전시공간임대를 기반으로 사진, 미술, 건축, 퍼포먼스,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장르를 대상으로 국제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수요일마다 2층에 있는 도서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아트스쿨을 연다. 또한 1층에 미술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운영하고 때로 출판업무도 담당하며 그 옆으로 카페와 펍을 겸하는 공간이 있어 회합의 장소로 사용한다.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와 더불어 2005년 도쿄예술대학이 구 후지은행 건물로 이전해왔으며, 구 제일은행은 2009년 5월부터 ‘YCC 요코하마 창조도시센터’로 전환되었다. 현재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 가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
1. 네이버 지식백과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출처: 아카렌가(赤レンガ) 창고 공식홈페이지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사진출처
1. MBC 뉴스 동영상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광주광역시 공식블로그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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