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전거로 사쿠라기초에서 신바시까지 달리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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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다마강(多摩川)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도쿄도(東京都)의 경계를 가르며 흐르는 강이다. 주말이면 도쿄 쪽 강변에서 골프연습을 한다. 사진ⓒ노기훈

시장을 빠져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 맞는 이가 있다면 자리를 깔고 앉아 나마비루(生ビール)라도 한 잔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일정 따위는 아무렇게나 되어버리자 하는 식이라 신바시(しんばし)까지 가지는 못할 일임을 알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 일본을 체감하기에는 이곳에서 살아온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얻는 깊이와 넓이만큼 알찬 과외도 없을 것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그러한 이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의 경험으로 이끌어 보건대 구하던 일은 예상치 못한 연으로 닿게 되어 평생의 기억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덥고도 습하기까지 하더니 저녁 무렵부터 여름비가 내렸던 날이었습니다. 나는 우산도 없이 초저녁부터 요코하마 이세자키초 어디에선가 알코올에 조금씩 젖어 들었습니다. 일본어 틈에서 태풍이라는 말을 찾기 쉬웠던 야키도리집의 텔레비전은 연신 히로시마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곧이어 도쿄로 향해 닥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면서2차로 고가네초에 있는 스탠딩바를 선택했고 그곳에서 한 일본인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코를 기울이면 미소된장보다 오래 묵은 곰팡이향이 나는 한국식 된장의 냄새가 호두나무에 배어, 닦아도 닦아도 닦아 낼 수 없던, 테이블을 힘주어 닦을 때의 인상이 표정으로 굳어버린 한국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무뚝뚝한 바였습니다. 노래의 절정에서 굵고 단단해지는 복성을 가진 이미자의 보이스를 그대로 닮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흐르는 강물처럼’이 일단락을 지나 숨을 고르는 틈을 타서 그 일본인은 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칸코쿠진?”
“하이, 와따시와 칸코쿠진”

취기가 오른 우리에게 현해탄을 가르는 국적도, 아버지뻘이라는 나이차도 별반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로 건배하고 또 건배하고, 술기운에 입에서 나온 서로 다른 말들은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열악함을 극복하고 어딘가의 다른 세계에서 만나 무난히 수긍되고 있었습니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허례허식처럼 하는 말로 그는 나에게 물어왔습니다.

“어떤 일본 음식을 제일 좋아하냐”

‘스시(すし)’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며 두어 시간을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북한의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했다는 대대적인 뉴스가 끝나고 볼품없는 연예인이 케이크를 먹으며 품평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견디고 나서 그는 회전초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고 저는 흔쾌히 따랐습니다. 

스시가 아무리 한국에서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꽤나 비싸게 마음먹어야 시도하게 되는 음식입니다. 소문을 듣고 일본에서는 현지음식으로 싸게 맛보겠다는 기대와는 달리 일본에서도 역시나 스시는 ‘김밥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가벼운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들어간 스시 집은 일본의 물가를 폭탄처럼 투하했습니다. 그 안 좋은 경험 때문에(혀는 덕분에 호강했습니다) 모르는 음식점을 찾아 들어가기 전 메뉴판을 보고 꼭 가격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이보다 더 쓸모 있는 요령은 바깥에서 노렌(暖簾)이 처진 틈 사이로 손님들의 옷매무새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럴 필요도 없이 이국에 놓인 혼자라는 전제를 떼버리고 마음껏 스시를 시켜 먹었습니다. 원하는 종류의 스시를 소리쳐 주문하는 일은 발음이 익숙하지 못한 외국인에게 늘 곤혹이었는데 이곳 사장님은 한국어 기초반 수준의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셨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사장님은 서울에 사는 50대 여성을 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옆에 일본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은 성대 끝에 걸린 빗장을 소리나게 꽝하고 열어젖혔습니다. 우리는 술에 좀 취해 있다고 생각이 들어 나마비루 대신 손이 닿기 좋게 초밥레일 위에 배치된 녹차티백과 찻잔을 집었습니다. 다음 스텝을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던 나의 컵을 가로챈 노구치 상은 컵을 버튼에 가져다 대어 압력을 주면 자동으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차를 우렸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소변기에서나 보던 꺼림칙한 일이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취기가 올라 있었지만 상온에서 적당히 숙성된 마구로(まぐろ)의 질감을 입은 메마른 혀에 닿던, 그 진한 녹차의 씁쓰름한 감촉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자전거는 일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통수단이다. 한국과 다르게 방범등록이 의무화되어 있어 도난당했을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대중교통수단이 매우 비싸 자전거 이용이 보편화되어 있다. 사진ⓒ노기훈

한국에서 일본에 도착한 지 열흘 밖에 지나지 않은 청년이 탄 자전거는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츠키지(築地) 시장을 지났습니다. 자전거의 주인은 시장을 빠져나오며 얼마 전 우연히 합석한 일본사람을 생각했고, 그러는 동안 도쿄와 요코하마의 중간지대인 가마타역(蒲田駅)에 도착했습니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풍경은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마타역에 왔다는 것은 오늘 왕복할 구간의 4분의 1정도를 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역 인근에는 맛깔스러운 음식점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뭔가 먹어야 한다면 이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을 너무 혹사시켜서 그런지 한참을 비어있던 위는 괜찮은 식당을 찾아 먹을 여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근처 소바 집에 들어가서 메뉴를 슬쩍 보고 A세트를 주문했습니다. 운 좋게도 가츠동과 차가운 소바였습니다.

밥을 먹으며 두리번거렸습니다.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아 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와사키역(川崎駅)에서도 생각한 것이지만 가마타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어디 가서 자신을 도쿄 사람이라고 소개할지 아니면 요코하마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어필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국토가 큰 나라의 선술집에 가면 다른 지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흔히 처음에 나누는 대화는 ‘너는 어디 출신이냐’ 혹은 ‘다른 어느 지방을 가봤냐’를 서로 공유해 가면서 진행되고는 합니다. 가령 중국에서는‘저는 내몽고에서 왔습니다’라고 운을 떼는 북방사람이 멀리 광저우 출신과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만나 청도 맥주를 들이켜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저는 훗카이도 하코다테에서 시덴을 타고 1시간 정도 남쪽으로 가면 있는 야치가시라라는 곳에 삽니다. 간혹 바이어를 만날 때면 JR을 타고 삿포로에 가서 단골 칭기스칸 집의 양고기 안심과 삿포로 맥주를 즐깁니다’라고 말하는 일본식 낭만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일본 사람이라면 요코하마를 비롯한 도쿄일대를 간토(関東)라고 엮어서 부릅니다.

그럼 시야각을 좁혀보자면, 가와사키에사는 사람은 요코하마와 도쿄의 자기장 안에서 휘둘리며 유행처럼 요코도쿄라고 불러야 하는 정체성이 입혀질 수도 있겠습니다. 대개는 도쿄에 빨려 들어가고 싶은 기분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부천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깊게 생각할수록 이런 경계라는 것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집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 제가 도시를 볼 수 있는 것은 빌딩의 높이가 달라지는 추이를 바라보는 것이 다 일지도 모릅니다.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천(富川)과 가와사키(川崎市)가 바다를 두고 강물을 불러일으키고 요코하마(橫濱)와 인천(仁川)은 바다를 마주보는 관문이 되며 도쿄(東京)와 서울(京城)은 육지와 바다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오랜 세월을 한 나라의 수도로 번성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서울과 도쿄는 같은 표준시를 쓰지만 경도가 12.8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출과 일몰이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사진ⓒ노기훈

그런 이치로, 도쿄로 가까워질수록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피해서 달려야만 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대로 접어들수록 거리의 사람들은 각자의 탈 것을 이용하여 이동했습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자세가 아직도 불안했지만 슬쩍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들의 속도감에 맞춰 천천히 달렸습니다. 저는 일본사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강한 나라의 일원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아 비로소 근대시민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난여름, 파리 중심가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프랑스인의 일본사람이냐는 물음에 한국사람이라고 답하자 실망하던 그의 미간의 주름들이 떠오르며, 국제무대에서 일본과 한국과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작 자전거를 타면서 질서와 법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서로의 편의를 돕는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각기 다른 신분에 살고 있다는 중세의 유물이 조금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더 인간적이고 실리적인 듯했습니다. 어설프게 민주적이지 않아 오히려 편리했습니다. 집에서 벗어나면 누군가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한국의 거리는 민감한 이가 아니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고는 사는 일이 인내가 돼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여성들은 매일같이 마그마가 튈지 모르는 지옥 언저리에서 근근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태까지 지켜본 바로 일본에서 그런 일을 겪는 일은 ‘정말 네가 오늘 더럽게도 재수가 없었구나’하는 상황으로 재난을 당했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도쿄의 놀이터는 대부분 검은 흙으로 땅이 이루어져 있다. 놀이터마다 기구의 생김새가 달라 구별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사진ⓒ노기훈

가츠동을 먹고 다리는 힘을 얻었습니다. 잘 정돈된 보도블록을 따라 자전거 무리들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도록 왼쪽 방향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다리에 힘에 빠지면 도쿄 쪽으로 고개를 들어 힘을 얻었습니다. 열차들은 동서남북으로 빠르게 스쳐지나 갔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가면서 주인 몰래 헤드라이트를 켠 부지런한 자전거들도 보았습니다. 하늘은 아직도 맑았습니다. 조도만 옅어져 빌딩 숲 안을 조금 어둡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하늘을 대고 스포이드툴로 찍으면 하늘색 표본으로도 삼아도 손색없었던 하늘이 점점 분홍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흙으로 땅을 삼은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피곤한 눈으로 벤치에 걸터앉아 부모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빌딩 속에 은신해 있던 신사(神社)들이 조금씩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르는 신사 앞에서 손뼉을 쳤습니다. 일본 곳곳에 있는 8만여 개의 신사 중 저와 부합하는 하나의 신을 떠올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이곳이 그곳이기를 바라는 예의도 잊지 않았습니다.

신사(神社)의 입구에는 경내와 속계의 경계를 나타내는 도리이(鳥居)가 있어 신전까지 참배 길이 통한다. 사진ⓒ노기훈

기도를 떠올리며 신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둠도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안으로만 돌아가자는 일념으로 도쿄를 헤쳐나갔습니다. 지형지물이 많아 인도로는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자동차가 다니는 옆으로 신세를 좀 졌습니다. 자동차 보다 빠른 사이클이 신경질적으로 저의 옆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오히려 차들이 저를 비호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시나가와역(品川駅)으로 가는 고가도로 위에서 멀리 소실점이 보이는 요코하마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좀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을 했습니다. 녹슬어 보이는 철로의 쇳가루들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부식되지 않는 강인함을 보았습니다. 경인선을 만든 똑같은 재료일까도 잠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열차들은 레일을 따라 아주 세밀한 간격으로 번갈아 지나갔습니다. 멀리 도쿄 쪽을 보니 오다이바(お台場)의 풍경이 보일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저곳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데이트하며 한껏 즐기고 있겠지라는 생각에 이르자 자전거에 올라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습니다. 고통에 다르면 생각은 멈추게 됩니다. 이윽고 건물들이 수직으로 솟아 있고 호텔이 비일비재한 시나가와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나가와역에서 신바시로 가는 길은 일본식 아파트쯤으로 되어 보이는 연립주택이 많았습니다. 시나가와구가 일본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더니 그 영역이 오타구인시나가와역까지 미치고 있나 봅니다. 베란다 크기로 집의 크기가 손쉽게 예측되는 일본식 연립주택을 지나 더욱 어두워진 도쿄의 중심부로 들어왔습니다. 구글맵을 켜 지도를 봤습니다. 30분만 더 달리면 신바시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열차를 기점으로 거의 5시간을 도로를 따라 달렸지만, 가래는커녕 기침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코막힘도 없었습니다. 일본의 전자제품이 발달한 이유가 먼지가 없고 공기가 좋아서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큰 구름처럼 확연히 보이는 미세먼지가 서서히 사람을 죽이고 있는 한국 보다 차라리 방사능의 위험이 있어도 지금의 일본이 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 같았습니다. 어릴 적 했던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나오던 장면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타국에 머무른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이 아닌 어떤 곳이라도 지옥에서 벗어난 쾌감만이 있는 환상의 공간처럼, 순진하게도 그리 보였습니다.

시나가와역(品川駅)은 1872년 도카이도 본선(東海道本線) 첫 개통 당시 개업한 역이다. 신바시역(新橋駅)이 기점이지만 지금의 JR신바시역은 구신바시역의 역사를 이어받지 못한 관계로, 시나가와역은 일본 최초의 철도역 중에서 가장 기점에 가까운 역이다. 사진ⓒ노기훈

도쿄의 빌딩 숲에 있으니 그저 달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미명만이 남아있는 도쿄의 하늘을 대신해 새로운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 불빛은 이미 나타나 있었습니다. 거대한 해가 떨어져야만 보였던 것입니다. 빛들의 시간이 점차 시작되었습니다. 도시의 표면을 밝히는 조명들이 빛의 속도로 어딘가에 맞붙이치고 다시 어디론가 가서 부딪치고 해서 끝까지 사그라지지 않고 엉키고 엉켰습니다. 자전거를 몰아 도쿄의 중심지로 들어갈수록 나는 빛에 이끌려 더 어두운 곳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연한 어둠이 된 도쿄의 중심을 따라가면서 이쯤이면 거의 다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오래된 건물이 멀리 보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멀리서도 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호가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곳을 향해 단번에 달려갔습니다. 도착하여 건물의 주변을 돌았습니다. 건물의 뒤편에서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철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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