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성(徐一星,1906∼1950)은 1960년대의 명배우 신성일(申星一)에 비교할 정도의 큰 인기를 누렸던 명배우였다.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기록들이 그런 면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인천 이야기’ 기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서는 인천이 낳은 이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유명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도 전혀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인천시사』 인물란에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인천 출신이면서도 서울에서만 활동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서일성은 인천 태생으로 1925년 초창기 신극단 토월회에 참가하여 이백수, 윤심덕 등과 활동했다.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여 서울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에 매진했다. 1939년에는 연출가 박진 등과 함께 극단 아랑을 결성했으며, 8·15 광복 직후인 10월 양백명, 장진 등과 극단 백화를 창단했다. 6․25 동란 때 주안에서 서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북한군에게 협조하지 않아 피살당했다.
일제 때 그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유명 연극평론가가 격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혼자만으로도 부민관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이 들 정도로 중후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부활」 버나드 쇼의 「오로라」,「춘향전」, 「박쥐의 집」, 「백의 민족」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미남에다가 게리 쿠퍼처럼 체구가 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유연했고 뛰어난 발성으로 ‘모범 만능’이라는 평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당시 최고의 배우였다. 인천에서 이렇다 할 만한 연극 활약은 없었다 해도 인천이 낳은 대배우, 명배우였음은 틀림이 없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