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가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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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인천여성영화제 ‘Herstory, 그리고 함께’

제13회 인천여성영화제 ‘Herstory, 그리고 함께’를 취재하기 전, 김진아 시민기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물론 그녀가 여성이고 본인이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김진아의 글 도입부에서도 잘 드러나듯, 한국에서 남자로 살아온 30년의 삶이란 어떠한 면에서는 분명 경험의 빈곤이다. 미러링(mirroring)은 이 경험의 빈곤을 꼬집었지만 다소 폭력적인 양상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진아는 공감의 제스처로서 여성영화제의 ‘공론장’적인 성격을 부각시킨다. 이 공론장 속에서 미러(mirror)는 프리즘(prism)이 되어 다양한 각도로 빛을 분광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필자의 글은 경험의 빈곤을 무릅쓰고 페미니즘의 자리와 운동을 조명한다. 여기서 페미니즘은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수행하는 ‘쉼표(,)’에 자리하고, 흔들리는 대지처럼 ‘운동’을 지속한다. 이 두 글은 여성영화제를 소재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이 두 글의 관계를 매치컷(연결), 점프컷(분리), 몽타주(충돌과 결합) 중 어느 것으로 볼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페미니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서_ 김진아

“충격이네요.” 폐막작 <시국페미>(2017)를 함께 본 박치영 시민기자가 상영관을 나서며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시국페미>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치던 지난 겨울, 광장 안에서의 여성혐오를 다룬 작품이다. 그는 광장에 수차례 나갔지만,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여성혐오가 일어나고 있었는지, 여성들이 처했던 부당한 상황들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시국토크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울먹였던 여성관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솔직한 고백은 나에게도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종종 페미니즘 이슈에 동의하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을 비난해왔다. 동시에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들어볼 여지조차 두지 않고, 동의를 강요해왔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내가 일상에서 부당함을 겪었기에 당연한 가치였을 뿐,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를 높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특수한 상황일수록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은 외롭고 길어진다. 여성으로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경험해본 이들만이 페미니즘에 동의할 수 있다면, 페미니즘은 인류의 절반에게는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것일까? 당해본 적이 없기에, 겪어본 적이 없기에, 공감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동의를 구할 수 없는, 반쪽짜리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나머지 반쪽과의 연대 가능성은 정말 없는 것일까?

제 13회 인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은 ‘Herstory, 그리고 함께’로, 평범한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조명함과 동시에, 남성·여성 정체성을 극복하는 젠더 감수성을 높이자는 의미를 담았다. <런던 프라이드>가(2014) 페미니즘 영화가 아님에도 상영작으로 선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나와 입장이 다른 누군가와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런던 프라이드>는 1984년 영국에서 파업하며 권리를 주장하던 광부들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던 성소수자들이 연대한 과정을 그렸다. 접점이 없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소수자 집단이 연대하는 과정은 곧, 서로의 입장에 접점을 찾고 공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모였던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광부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당했던 탄압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광부들에게 후원금을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광부들은 그들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거부한다. 광부들의 눈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성소수자들은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낯선 이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신명 나게 디스코를 추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빵과 장미’를 부르며 서로의 아픔에 공감해간다. 그들은 공감을 통해 연대하고, 연대를 통해 각자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권리들을 되찾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연대가 이끌어내는 힘과 즐거움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실질적인 연대의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춤과 노래가 공감과 연대를 끌어낸다는 <런던 프라이드>의 설정은 지나치게 영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다가온다. 연대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공감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혐오로 점철된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이슈에서 춤과 노래로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해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이 다른 반쪽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미러링’이었다. ‘거울(mirror)처럼 반사해서 보여준다.’는 뜻의 ‘미러링’은 기존 여성혐오의 발언과 사례들을 수집하여 성별을 바꾸는 방법으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폭력성을 폭로하겠다는 의도로 쏟아져 나왔다. 여성과 남성이 바뀐 세상을 그린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장편소설 <이갈리아의 딸들>과 단편영화 <억압받는 다수(Majorite Opprimee)>등의 작품이 큰 인기를 얻었고, 인터넷 상에서 ‘벌레 같은 한국 남자’라는 뜻으로 김치녀 프레임에 맞대응하기 위한 단어인 ‘한남충’, 여자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말을 듣는다는 ‘삼일한’에 대응하여 남자는 숨쉴 때마다 패야 한다는 ‘숨쉴한’ 등의 신조어들이 등장했다. 초반에는 여성혐오를 인지하지 않고 살아가던 한국사회의 남성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혐오를 재생산하는 공격적인 방식으로 쉽게 거부감을 안겼고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다.

인천여성영화제가 잃어버린 반쪽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내세운 전략은 ‘Herstory’, 평범한 여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작품 속 인물을 따라가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경험하기 어려운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는 기회를 가진다. <맥북이면 다 되지요>(2017)에서 완경을 앞둔 주인공이 늙은 암소를 어루만지며 고생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완경기 여성의 마음을 공감해보기도 하고, 광장에서의 여성혐오를 증언하고 스스로의 고민을 털어놓는 <시국페미> 속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보며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위로받고, 남성들은 광장에서 듣지 못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기회를 얻는다.

여타 영화제에서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영화의 완성도나 작품성, 표현방식 등에 초점을 맞춘다면, 인천여성영화제의 관객들은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비추기도 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돌아보며 함께 토론한다. 페미니즘을 여러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열린 집담회를 진행하는 데에 앞서 각각의 영화들이 이슈를 소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이 되는 셈이다. 인천여성영화제는 여성영화를 관람하는 축제임과 동시에, 건강한 페미니즘 담론을 형성하는 공론장으로써 기능한다. 페미니즘 이슈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반쪽에게 건강한 방식으로 공감과 연대를 제안하고, 영화제를 이루는 반쪽인 관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작품을 수용하고 토론할 것을 제안하는 인천여성영화제는 지금, 잃어버린 반쪽을 채워가는 중이다.

 

흔들리는 대지_ 박치영

인천여성영화제의 작품들을 만나면서 나에게 페미니즘이 ‘흔들리는 대지’(루치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1947)에서 차용했음을 밝힌다)처럼 다가왔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그 흔들리는 대지 자체가 페미니즘이라 말하고 싶다. 페미니즘에 관한 일천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신세대 페미니즘이 거주하는 ‘자리’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관련된다.

페미니즘의 자리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이 자리를 발견하기 위해 나는 <못, 함께하는>(2016)을 방법적으로 우회할 것이다. <못, 함께하는>은 휴대폰, 메신저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콜라주 되어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각각의 이미지들은 분리와 연결 속에서 영화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의 분리와 연결은 형식적인 실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냥(이나연 감독)의 자전적인 서사(개인사)를 위해 사용된다. 여기에는 ‘카톡방에 엄마 초대하기’라는 분명한 목표점이 존재하며, 에필로그에서 냥은 엄마를 ‘정확하게’ 사랑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이 영화는 사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적 다큐멘터리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이 형식들이 작동하는 지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못 하나가 빠지지 않아 옛 전등은 새 전등 옆에 그대로 매달려있다. 카톡방에 모여 사는 우리 가족에게도 빠지지 않는 못 하나가 있다. 그곳에 초대할 수 없는 경희씨, 바로 우리의 ‘엄마’이다.”

냥의 가족은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엄마 아빠의 이혼이 그 시발점이겠으나, 냥에 의하면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엄마의 재혼’이다. 그래서 냥의 가족이 모여살고 있는 카톡방에 엄마는 초대되지 못한다. 엄마는 시종일관 ‘못’으로 은유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못’이란 글자는 매우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뾰족한 ‘물건(nail)’이자 ‘부정(not)’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영화제목을 구성하고 있는 ‘못’과 ‘함께하는’은 거리가 멀어져 끊어질 경우에도, 반대로 그 둘을 붙여 놓는 경우에도 함께할 수 없다. ‘못/함께하는’은 그 둘이 서로 아무런 관련성도 갖지 못하기에 함께할 수 없으며, ‘못 함께하는’은 말 그대로 못 함께한다. 다시 말해, ‘못’과 ‘함께하는’이 함께하기 위해선 분리와 연결의 동시적 사용이 필요한데, 이 영화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쉼표(,)’이다. 쉼표는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기호이다[이와 유사한 기호로는 하이픈(-)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지들 그리고 ‘못’과 ‘함께하는’ 사이의 쉼표는 엄마를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 냥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이며, 여성이 못이 된 사회문화적 조건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페미니즘의 자리이다. 이러한 분리와 연결의 동시성은 왜 페미니즘이 인터넷, SNS에 주둔하며 유동적인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줄곧 ‘연결’만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분리’를 동시에 사유하지 못하면, 우리는 최근 있었던 ‘여성혐오 아카이브’와 ‘문화예술계 성폭력 아카이브’ 등의 움직임을 제대로 사유할 수 없다. 각각의 분리된 경험이 연결되면서 네트의 노드들은 알 수 없는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다. 그 웅성거리는 노드들의 응집이 몇 가지 의제로 발현된다. 비정규직 여성노동, 강남역 살인사건, 낙태죄 폐지 등이 그것이다.

<시국페미>(2017)는 이러한 아카이빙에 동참하면서 최근에 있었던 촛불혁명을 재검토한다. 영화 속 페미니스트들은 촛불혁명 당시 자신들이 대통령의 비리에도, 광장의 여성 혐오에도 맞서 싸워야했다고 증언한다. 이는 촛불이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시국페미>는 촛불을 승리자의 역사로서 단단한 덩어리로 균질화 하려는 시도에 저항한다. 당시의 DJ DOC의 광화문 광장 공연취소로 벌어졌던 소란은 그에 대한 좋은 사례다. 공연취소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곧장 비난으로 응수했다. 하나로 똘똘 뭉쳐도 시원찮은 판국에 왜 훼방을 놓냐는 식이다. 페미니즘이 (누가 결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시급하다고 판단되는 의제 앞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촛불은 그저 단단한 덩어리다. 그 덩어리의 서사 속에서 대통령의 구치소행과 새로운 정부의 출범은 정치의 끝이다. 운동은 거기서 멈춘다. 촛불도 꺼진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다. 혁명은 끝났는가? 청와대에서 끌려나 온 자는 지금 아픈 발가락을 부여잡고 있지만, 여성혐오는 여전히 만연하다. 페미니즘은 끝나지 않은 운동으로서 여전히 남아있다. 영화가 끝난 후 이어진 GV에서의 페미당당의 활동가 심미섭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자신의 운동이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의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자신을 확인한다. 이제 촛불이 그 흔들리는 대지 위에 설 차례다. 그 위에 설 수 없는 촛불은 꺼졌고, 꺼질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이란 말로 대체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우리가 도달해야할 어떠한 상태가 아니다. 지속되는 남성 카르텔 속에서 페미니즘이란 현실의 상태를 지양할 현실적 운동이다. 

 

글, 사진/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진아, 박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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