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청자 그리고 원로예술인의 행복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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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웅 도예 여정》, 2017년 7월 1일~7월 31일, 강화도 도솔미술관

청자, 욕망의 그릇
인천이 청자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비색 고려청자의 발전과 절정을 준비하던 곳이 이 땅, 인천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역사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미술의 역사는 사실 인간 욕망의 역사라 할 만하다. 돌이켜보면 현대 이전의 거의 모든 미술 활동은 의뢰인과 생산자가 존재했고, 그들이 만들어낸 미술품(당시에는 그것을 ‘미술’로 부르지도 않았지만)에는 뚜렷한 지향점과 실용적 목적이 담겨 있다. 물론 그 지향점은 오늘날의 미학적 지향점을 궁극의 목표로 포함하지는 않지만. 청자 역시 그랬다. 청자가 고대의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중국은 아주 예전부터 부모가 돌아가시면 옥기(玉器)를 부장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래야 저 세상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옥의 생산은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당연히 옥기는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비싼 물건이어서, 기록에 따르면 떵떵거리던 부자가 옥기 부장으로 몰락했다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비쌀수록, 귀할수록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 법. 그리고 그 비싸고 귀한 물건을 대신하는 물건을 만들려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법일까.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이미 서진(西晉) 무렵에 옥색과 가깝게 그릇을 구우려고 하는 시도가 절강성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빛나는 순금을 빚어내려는 중세의 연금술사처럼 중국의 도공들은 옥을 재현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마침내 당말오대(唐末五代)에는 청자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중에서도 월주요의 청자는 천하제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인천과 녹청자
한반도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중국처럼 옥기를 부장하는 풍습은 곧 청자로 바뀌게 되었고, 한성백제 시대 도읍이었던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출토된 중국제 청자 파편들은 이를 증명한다. 세월이 흘러 고려왕조가 들어서고 청자를 국산화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고려로 귀화한 중국의 도공들이 중요한 생산자였다. 도자기는 흔히 흙과 불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만큼 재료(태토)가 되는 흙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고려청자는 좋은 흙을 찾기 위한 모색과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처음은 개경 지역이었다. 개성 지역에서 발굴된 초기 청자 가마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흙은 청자를 만들기에 썩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던 듯, 이내 경기도 용인 지역으로 청자의 주된 생산지가 옮겨 가게 된다. 그러던 과정에서 중요한 청자의 생산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우리는 인천, 그 중에서도 서구 경서동 일대에서 생산된 청자를 ‘녹청자’라 부른다. 이 녹청자는 이후 전라북도의 부안, 전라남도의 강진 일대에서 생산될 최고급 청자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소 투박하면서 거친 듯한 녹청자는 발전 도상에 있는 청자의 초기 모습이기도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당시 고려인들의 미감이 그대로 녹아 있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유홍준 선생은 이러한 현상을 ‘청년기’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세련미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패기 있는 기상이 담기며, 노회한 기교보다는 선 굵은 청년의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녹청자가 만들어진 인천 땅은 씩씩한 청년의 기상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이부웅의 여정
인천 출신으로 인천에서 녹청자를 평생 만들어온 도예가가 그의 긴 여정을 보여주는 전시가 열렸다. 《이부웅 도예 여정》이 열린 강화도 도솔미술관에서 만난 그의 녹청자를 비롯한 옹기 20여 점은 초기 청자의 웅혼함과 그가 평생을 두고 탐구해왔던 정제된 미적 실험정신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년에 들어선 이부웅 선생의 작품들은 녹청자로부터 시원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지만 현대 도예의 미학적·형식적 실험을 반영한다. 90년대에 제작한 발(鉢)은 넉넉한 품을 지닌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과 예민한 감수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녹청자라는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백자와 토기의 장점을 수용한 각병(角甁)과 유병(油甁)에 이르면 전통을 해석하는 현대적 감각의 산물인 양 읽힌다. 특히 유병은 전통 옹기를 그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변주함으로써 하나의 성공적 오브제로 승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마치며
이 전시는 2017년 처음으로 선보이는 인천문화재단의 ‘원로예술인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모든 원로예술인들은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평생을 두고 오직 녹청자의 현대적 해석에 몰두한 이부웅 선생의 여정을 제시하는 이 전시는 인천문화재단이 원로예술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시민들에게 그 뜻을 환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군다나 녹청자의 고향인 인천에서 인천 작가에 의해 재현·발전한 결과물을 인천시민과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고 보인다. 앞으로도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지역의 원로예술인들이 당당하게 창작 활동을 펼쳐 보이는 장으로서 ‘원로예술인 지원사업’이 자리 잡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이부웅 선생의 도예 여정에 경의를 표한다.

 

글, 사진 / 인천문화재단 예술지원팀 박석태(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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