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된 풍경, 선택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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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더위가 시작된 일요일 오후, 가족들과 함께 이호진 사진전 《허락된 풍경》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출발지인 송도에서 전시 장소인 배다리까지는 차로 불과 20분 남짓입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주변 풍경이 급격히 달라졌지요. 이렇게 신도시와 원도심을 오갈 때마다 되풀이 되는 경험이 있습니다. 물리적 공간의 이동이라는 사건이 시간의 지층을 통과하는 여행처럼 전환되는 경험 말입니다.

우연한 풍경은 없다. 
경적과 인적이 드문 목적지에 도착해 전시장 입구로 들어섰습니다. 이호진의 작업의 첫인상은 축적된 시간의 위엄을 전하는 전시장과 결이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주택가 옥상 빨래처럼, 대도시 건물 현수막처럼 걸린 ‘흔하게 널린 풍경’ 사진들이 연출하는 흔치 않은 풍경이 전시장 안에 펼쳐지고 있더군요.

‘스페이스 빔’과 ‘사진공간 배다리’ 두 군데서 일주일 남짓 선보이는 전시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동안 지속된 작업의 결과라지요. 사진과 설치 영상 속 풍경은 이호진이 구체적으로 경험한 곳들입니다. 이호진 작업의 일관된 표정인 침착함과 진중함이 같은 장소를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하고, 배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기도 한 여정의 노고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호진이 답사와 탐문이 집중된 곳은 인천입니다. 그렇다고 이호진 작업의 문제의식이 인천이라는 지역에 한정된 것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나라 곳곳은 전쟁과 복구, 산업화와 도시화의 상황을 공유했으니까요. 특정 지역을 넘어 범용적 적용의 틀을 갖춘 이호진 작업 앞에는 ‘도시인문’이라는 꾸밈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풍경을 스펙터클한 경관으로 간주하고, 시각적 환영으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의지겠지요. 

‘우연한 풍경은 없다.’ 단언하는 이호진은 자연과 도시를 아우르는 풍경을 철저히 사회적, 역사적 소산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풍경을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생성되는 가변적 산물로 전제한 때문일까요. 이호진 작업에서 규범화되거나 변질된 풍경을 향한 시각 체험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어렵지 않게 감지되었습니다.  

이호진이 예술의 닻을 조화와 질서의 지점이 아니라 중첩과 대립의 경계에 내리고 있는 이유도 이런 예술 의지와 무관치 않겠지요. 폐허와 랜드 마크, 도시와 해변, 섬과 산 등, 다양한 장소를 경유하는 전시장 속 풍경들은 치유와 위로를 상상케 하는 유토피아적 공간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유와 해방이 한껏 보장된 낭만적 무대와도 달랐지요. 인간 또한 풍경을 구경하고, 대상화할 특권적 시각 주체는 아니었습니다.  

 

모순의 풍경, 사유의 매개 
이호진 사진 속 초록 잎 달린 나무는 두 개의 콘크리트 벽 틈새에서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파트는 울긋불긋 치장한 국적 불명의 관광지와 이웃해 있었지요. 또한 주택가 지붕 위 파란 하늘은 새로 지은 주상 복합 건물에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완공된 건축물 앞은 방치된 공사 폐기물 차지였어요. 한편 빽빽한 빌딩 숲이 둥근 해와 잔잔한 물 사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 매끈한 장소성에 부합하는 명칭을 흔쾌히 붙이기 어려웠습니다. 이호진이 의도적으로 하나의 장소에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 과정에서 추방되었던 불필요와 무의미를 힘껏 소환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호진 사진은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말하고자 풍경에서 인간의 흑적을 축출할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편안한 거주를 이야기하려고 불편한 소비를 삭제할 의도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허락된 풍경》展 이전 작업에서부터 지속되어 왔습니다. 과거 이호진은 재개발 예정지인 이주 현장에서 주인 잃은 오브제들을 수집해 폐허의 공간에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의 확증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예전 갯벌이었던 매립지와 이제는 산이 된 섬의 물리적 공간의 변형과 변화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기도 했지요. 뿐만 아니라 풍경을 현실과 별개의 공간으로 상상하고 획일적으로 소비하는 인간의 태도를 일련의 작업에서 비판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단절과 불연속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이호진 작업의 동선은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전개 과정을 거쳐 온 것이어요.

장소는 지도제작자 책상 위에 놓인 종이와 다르다고 했던가요. 장소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흔적을 깨끗이 지운 현재의 풍경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풍경에는 지나온 시간의 기억과 상흔이 내재해 있지요. 동시대의 역사와 사회, 경제와 정치의 다층적 편린들도 혼재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호진은 작업은 중심과 주변, 번성과 쇠락, 집중과 분산, 돌봄과 방치의 풍경을 위계적으로 의미화 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있었습니다. 개발과 보존, 거주와 이주, 노동과 휴식, 인공과 자연 풍경을 무리하게 통합하려는 시도도 없었지요. 그저 이호진은 장소의 얼룩덜룩한 단면과 들쑥날쑥한 층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적절한 지점에서 풍경의 실체를 포착해 제시할 뿐이었습니다.

의도적 편집을 거친 허구 같은 풍경에서 우리들의 비현실적인 현실과 마주합니다. 의미의 맥락을 고려치 않은 키치 같은 풍경에서 우리들 삶의 현장의 민낯과 대면했습니다. 순간, 이호진의 사진 속 풍경은 우리네 삶의 상투성을 부정하고, 삶터의 부조리를 되돌아보는 사유의 매개로 전환되었습니다. 상이한 풍경들이 연출하는 이상한 패치워크가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전시장에 오는 동안처럼,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서 생경함을 제공하는 끊김과 어긋남의 풍경은 일상 어디에서나 흔하게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분주함을 핑계로 기묘하게 짜깁기된 현실 풍경은 지금 당장 성찰해야 할 현안이라기보다는 언젠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 정도로 남겨지기 일쑤였지요. 그런데 참 역설적입니다. 문제적 현실을 본격적으로 사유할 계기를 일상이 아닌 예술이라는 비현실적 프레임, 이호진 사진들 앞에서 허락받았으니 말입니다.

 

삶과 공명하는 풍경 
전시를 보고 나와 전시장 옆 카페에 들렀습니다. 아담한 실내에는 이곳이 촬영지였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 포스터가 붙어 있더군요. 최신식 머신에서 내린 커피와 손 글씨로 쓴 메뉴, 옛날 팥빙수를 기다리는 동안 옆 테이블에서 동네 주민으로 생각되는 손님들이 마을 텃밭과 부동산 시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허락된 풍경》展의 그림자는 전시를 본 후 잠시 머문 카페와 주문 메뉴 그리고 옆 테이블의 화제에만 드리운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빠른 재생 버튼을 누린 듯 속도가 붙던 풍경이 정지 신호와 함께 멈춰 섰습니다. 그런데 신호 대기 중 건널목 맞은편 고층 빌딩에서 ‘22세기 서울’이라 쓰인 병원 간판을 발견했지요. 21세기 인천에 걸린 간판이 자신의 삶터에서 진짜 삶을 살 기회를 방기한 채 살아가는 빨간 불 켜진 우리의 현재인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자리, 풍경을 허락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사진전과 가상보다 더 가상적인 현실 풍경 사이에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폭력적인 외부 상황이나 영향력 있는 타자가 아닌 날마다 실수하고, 날마다 만회를 꿈꾸는 우리 자신이겠지.’ 조심스레 자답도 해보았습니다. 수많은 풍경들이 무한 리필 되는 도심 한복판, 삶의 한 순간이 이호진 사진 같은 풍경과 공명했습니다. 참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글 / 공주형(미술비평, 한신대 교수)
사진 / 이호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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