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걸 크러쉬와 차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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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은 1941년에 제작된 DC코믹스의 만화 캐릭터입니다. 슈퍼맨, 배트맨과 함께 DC코믹스의 ‘빅3’로 불리죠. 그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이 최근 개봉했습니다. 미지의 섬 데미스키라 왕국의 공주 다이애나가 원더우먼이 돼 1차 대전을 겪고 있는 인간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패티 젱킨스(46. 여)가 연출했네요. CNN은 “여성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이며, 영화의 흥행도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2017.6.6. 조선닷컴) 벌써부터 <원더우먼2> 제작 이야기가 들려옵니다.(자세히보기 ▶)

원더우먼 등장 모습. 사진출처 Youtube 캡처

<원더우먼>은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여성들의 액션을 화려하게 보여줍니다. 35명의 여배우가 6개월 동안 특별 훈련을 받았고, 원더우먼 역을 맡은 배우 갤 가돗은 9개월간의 트레이닝을 거쳐 아마존 전사로 거듭났다고 하네요. 여성 영웅을 단독 주연으로 내세우고 액션에 집중한 영화는 여성 영웅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만화로 처음 등장한 원더우먼은 강한 힘을 가진 여성 히어로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기도 했죠. 남성이 쇠사슬을 걸면 힘을 잃는 무기 등, 일부 설정이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요.

한국에도 주목받는 여성 원톱 영화가 있습니다. 김옥빈, 김서형 주연의 <악녀>(감독 정병길, 제작 (주)앞에있다) 인데요, 살인병기로 길러진 최정예 킬러 숙희(김옥빈 분)가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깨닫고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언론은 <악녀>가 남성보다 더 거칠고 독한 액션을 보여준다고 소개합니다. 숙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 위에 매달리고 남성보다 큰 장검을 휘두르며 액션을 펼친다고 하네요.

영화<악녀> 포스터

이들 영화 소개에 빠지지 않는 단어가 ‘걸 크러쉬’입니다. 걸 크러쉬는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멋진 여성을 뜻하는 신조어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이나 현상을 말합니다. 소녀(Girl)와 반하다(Crush on)를 합친 단어라고 하네요.

여기서의 선망과 동경은 ‘성적 감정’이 배제된 ‘강한 호감’을 뜻합니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닮고 싶은 외모와 뛰어난 패션 감각과 센스, 지성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일반 여성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흔히 대상이 가수일 경우에는 ‘허스키한 보이스와 강렬한 퍼포먼스’로, 연기자일 경우에는 ‘센 언니’ 등의 표현으로 걸 크러쉬와 매치하고 패션 분야에서는 ‘걸 크러쉬를 원한다면 투블럭 숏컷’으로 홍보합니다. 걸 크러쉬와 비슷한 단어로 ‘남성이 남성에게 갖는 동경과 찬양’의 의미를 가진 ‘맨 크러쉬’라는 용어도 있다네요.

최근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씨가 펴낸 책 <영초언니>는 박정희 정권 후반기인 1970년대 중후반, 소위 ‘운동권’에 몸담았던 이들의 젊은 날을 그린 작품입니다. 자전적 논픽션 에세이로, 등장인물이 모두 실명을 쓴 실제 인물이라고 합니다. 제목의 영초언니는 저자의 <고대신문> 4년 선배였던 천영초로, 그를 소개하는 기사에도 ‘걸 크러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오마이뉴스 2017.6.11. 자세히보기 ▶)

“천영초는 1970년대 중·후반 운동권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서명숙과 후배들에게 ‘걸 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토론하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여학생들의 서클 ‘가라열’의 리더였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서 저항하고, 행동했던 여자. ‘걸 크러쉬’는 외모나 캐릭터를 동경하는 선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렇게 ‘아픈 기억’에도 소환됩니다. 

‘걸 크러쉬’이미지,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앞서 <원더우먼>과 <악녀>를 언급했지만 여자가 주인공으로 ‘앞에 섰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영화, 괜찮은 영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 영화제는 있는데 왜 남성 영화제는 없느냐’, ‘많은 히어로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원더우먼에 그렇게 열광하느냐’는 남성들(?)의 질문은 악의 없음을 감안해도 충분히 나이브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 최소 6종의 인간 종이 살아있었습니다.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한 승자로 살아남았고, 그들이 현생인류 ‘인간’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사피엔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의 위계질서는 성별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죠.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남녀 간의 문화적, 법적, 정치적 차이 중 일부는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출산은 여성의 일이었고(여성에게만 자궁이 있었고), 사회는 이런 사실 주변에 문화적 개념과 규범을 층층이 쌓아올렸습니다. 하지만 하라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또는 차별이 ‘생물학적 근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사회에서 자궁을 가진 개인(=여자)은 법적 지위를 갖지 못했습니다. 판사는커녕 평의회 의원도 되지 못했죠. 교육 기회가 적었고, 사업을 하거나 철학적 논의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자궁이 있으면 정치 지도자, 웅변가, 예술가, 상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아테네 여성은 투표에 참가하고, 공직에 선출되며, 연설을 하고, 대학에 다닙니다. ‘자궁 때문에’ 남자보다 뒤쳐질 일은 없죠.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란 두 개의 X염색체와 하나의 자궁, 많은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지닌 사피엔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상의 인간 질서에 속하는 여성 구성원을 말한다. 그녀가 속한 사회의 신화들은 그녀에게 독특한 여성다운 역할(아기를 키운다), 권리(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의무(남편에게 복종)를 부과한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18-219쪽.(볼드체는 필자)

사진출처 : 브런치

이번에는 10년 전에 출간된 책 이야기입니다. 제목이 <남자 사용 설명서>네요. 여성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 씨에 의하면 이 책에는 “미니스커트, 숏팬츠보다 짧은 옷 안에 제발 쫄쫄이 속옷 좀 입지 마시라”(33쪽), “콘돔의 사용은 섹스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하다”(195쪽) 같은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남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효과적인 노출법도 제시, 아니 지시하고 있다네요.(한겨레. 2017.6.9. 자세히보기 ▶)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문화는 일상적입니다. 정희진 씨는 이를 두고 “여성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눈요깃거리는 눈으로 보고 즐기며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눈요기 대상화’의 빈도가 잦고, 종종 사물화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눈’을 만족시키는 예쁨과 멋진 사람은 좋은 것, 그 반대의 경우를 대변하는 듯한(?) 장애인과 노인은 나쁜 것,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상투성과 차별적 상상 속에 있나요?
걸 크러쉬는 정말 ‘힙한’ 단어일까요?

▼ 트위터에서 검색했습니다.

모든 미디어는 반페미적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고 동시에 페미적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음. 어떤 작품이든 100% unfeminist 하지도 않고 100% feminist 하지도 않을 거라는 거다. 원더우먼의 의의를 긍정해도 갤 가돗이라는 배우가 후자거든요. 원더우먼이라는 영화가 여성 인권에 기여하는 바를 그렇게 괜히 과장해가면서 너무 의미가 큰데~ 이 난리 치는 거 정말 이해 안감. @sapphologie

악녀가 보다 더 엄중하게 까이는 것은 그것이 겉으로는 여배우 원톱에 여성주의 시각이라는 포장을 덧씌우고 있으면서 정작 내용은 대놓고 알탕인 영화보다 훨씬 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dimentito

악녀는 관객이 기대하는 vs 감독이 보는 ‘여성’ 캐릭터의 괴리가 너무 크네. 감독은 숙희의 성별을 계속 의식하는데 그 여성적 특성이란 것들이 너무 낡고 진부하고 형편없음. @schillingty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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