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정보의 홍수에서 살아남는 법,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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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인터넷 확산의 예기치 못한 효과로 우리 사회는 정보 과잉이라는 만성적 소화불량에 허덕이고 있다. 방송사, 신문사, 통신사 등 기존 뉴스 미디어부터 1인 미디어까지 다양한 매체환경에 둘러싸인 한국 사회는 하루 평균 400여 개의 뉴스 생산자가 발신하는 3만여 건의 뉴스 콘텐츠를 소화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비자와 독자의 입장에서 어디를 찾아가, 무엇을 읽어야 할지를 선별하는 것조차 버거운 현재 상황에서 ‘큐레이션’으로 호명되는 정보 길라잡이의 등장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의미의 ‘큐레이션’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잉태했다. 다양한 예술작품의 정보를 찾아 모으고, 새로운 관점에서 창작자와 작품을 해석하여 갤러리나 거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사람을 통상 큐레이터라 부르며, 그러한 행위를 큐레이션이라 일컫는다. 미술관과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각양각지에 산재한 예술작품을 묶어내고 읽어내는 관점을 제공하듯이, 인터넷 세계의 넘쳐나는 정보를 맥락화하여 이용자에게 간추려 제시하는 행위 또한 큐레이션의 범주에 포함된다. 뉴스 큐레이션, 제품 큐레이션, 지식 큐레이션 등 현재 통용되는 큐레이션의 쓰임새를 일별해 보면, 정보와 의제를 직접 생산하는 발신자보다는 이미 축적된 콘텐츠의 소비방향을 선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공개된 정보의 가치를 선별하고 이용자의 취향을 고려해 재분류함으로써, 정보의 접근성과 활용률을 높이는 행위인 것이다. 
 
네이버, 피키캐스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의 대형 콘텐츠 플랫폼이 주도하는 큐레이션 행위가 뉴스 생태계를 교란한다거나 저작권에 대한 정당한 지불 없이 콘텐츠를 활용함으로써 시장 질서를 훼손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정보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높이자는 본래의 취지가 특정 언론사나 상품의 소비행위를 부추기는 경제적 효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지점은 플랫폼 업체들이 주도하는 큐레이션 행위와 달리, 공공적 목적에서 대중의 문화 향유권을 신장하고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와 지식의 잠재적 가치를 확산하는 큐레이션 문화의 가능성과 확장성이다.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그 개념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선행사례도 찾기가 쉽지 않지만, 해외사례를 통해 큐레이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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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폼 아카이브(www.longform.org)는 영어권의 주요 신문사와 잡지에 실린 기사와 에세이를 스크랩해 모아놓은 사이트이다. 2010년부터 자원봉사자들의 동참으로 시작한 아카이빙 활동에는 큐레이터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자발적으로 각자의 관심에 따라 다양한 매체에서 선별해온 글을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올라온 글 대부분이 2,000자를 넘는 장문으로 구성된 점이 특이하다. 인터넷 서핑에서 접하는 대부분 글이 짧고 이미지를 보충하는 방식이기에, 상대적으로 쉽고 재미는 있으나 내용적 충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한 롱폼의 창립자들은 글쓴이의 충분한 생각과 조사가 바탕이 된 기사와 에세이를 큐레이션의 대상으로 한정했다. 그러한 노력을 신뢰했기 때문일까? 롱폼의 창립자인 맥스 린스키(Max Linsky)에 따르면, 빈 라덴이 암살당한 날 그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이용자들이 80만 명이나 사이트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렇듯, 선정적이거나 흥미 위주의 토막글에 싫증이 난 독자들에게 롱폼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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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과 오프라인 활동을 결합한 영국의 필름클럽(www.filmclub.org)도 큐레이션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0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필름클럽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영화를 함께 보고 토론하는 비평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출발했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문화상품인 영화 한 편조차 관람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현실과 영화가 단순 오락거리로만 소비되는 현상에 주목한 필름클럽은 우선 학교 현장에서 영화를 함께 보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큐레이션하는데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대중영화는 물론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다양한 주제와 시청 연령에 따라 목록화하고 영화마다 토론교안을 제공함으로써 아이들의 인문적 소양과 비평적 사고력을 높이는 데 힘썼다. 그 결과로 10년 전에 불과 25개의 학교에서 시작한 필름클럽이 이제는 매주 20만 명이 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만나고 있으며, 영국 정부(£26 million)는 물론 민간 재단으로부터도 상당한 재원을 후원받고 있다. 현재는 영화보기와 읽기교육과 더불어 제작교육까지 병행하고 있으며, 웹사이트에 주제별 나이별 영화리스트와 토론교안을 공개함으로써 영화를 통한 문화예술교육의 길라잡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롱폼 아카이브와 필름클럽의 사례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큐레이션은 이미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경험이거나 활동이 아니다. 단지 기존의 프로그램을 큐레이션의 관점에서 사고하거나 기획하지 못했을 뿐이다. 특히, 큐레이션의 기능이 문화예술의 공공성 확대라는 이슈와 연계될 때 그 확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필름클럽의 초기모델과 유사한 인천의 경험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을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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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영상위원회의 <별별(別別)시네마>와 <민들레 극장>, 인천여성영화제의 <모씨네>, 남구학산문화원의 <하품학교>, 영화공간주안의 <사이코시네마 인천> 등 인천 지역의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지역주민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진행해왔다. 극장으로 주민들을 초대하여 영화상영이 끝난 후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하품학교>와 <사이코시네마 인천>, 공연장이나 도서관 등 친숙한 문화공간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별별(別別)시네마>, 문화시설이 부족한 주민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는 영화 감상프로그램 <민들레 극장>과 <모씨네>까지. 모두 영화관람 환경과 참여 주민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영화를 선별하고 토론 이슈를 준비한다. 극장에서의 일반적인 영화관람 행위와 달리, 영화를 우리 사회나 나의 삶과 연결하여 생각해보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고력과 표현력을 높이는 인문적 학습활동이다.

이렇듯 흩어진 프로그램과 그것의 성과를 큐레이션의 관점에서 재조직하고, 이를 공유하기 위한 오픈 플랫폼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시민의 문화적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문화적 공유지의 지역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정보 큐레이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저작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공 아카이브’ 혹은 ‘오픈 플랫폼’ 구축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허은광(재단 기획경영본부장, 인천문화통신 3.0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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