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꿋꿋하게 오늘을 밀고 나가는 힘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했다. 198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고래를 기다리며』 외 4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인천문인협회 인천시지회장과 인천문화재단 3기 이사, 그리고 인천문화재단 제4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신포동 패션거리 알아요? 거기서 봅시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지명이었다. 한때 인천의 명동이라 불리던 신포동이 지역의 패션 메카였다는 사실은 조금이라도 인천과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필자라고 다를까?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신포동 패션거리를 누볐던 추억 하나쯤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최근 수년 동안은 들어보지 못했던 명칭이라,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때 익숙했지만 어느덧 낯설어진,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신포동 패션거리에서 시인을 만났다.
현재의 신포동 |
기억 속에 추억을 다시 꺼내며
김윤식 시인은 최근의 근황을 ‘다시 읽기’라고 말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전에 한 번 들춰보고 말았거나 묵혀두었던 책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읽기’를 통해 책에 깃든 자신의 옛 시간과 그 당시의 느낌과 마주하는 일이 매일의 감각을 다르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다른 일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바로 ‘정리하기’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한 사고 때문이었다. 어느 날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서 그 안에 저장된 대부분의 파일이 지워지는 ‘대참사’를 겪은 것이다. 250여 편의 인천 관련 글들, 책으로 묶고자 준비하던 930여 매의 원고. 백업조차 없는 글들이 마치 애초부터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는 한동안 깊은 정신적 공황을 겪기까지 했다고 한다. 모든 ‘글쟁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삭제된 파일 중 여기저기 메일로 전송했던 일부 원고를 찾아내면서 당시의 기억을 다시 환기하는 작업으로 변주되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찾아낸 파일들을 정리하며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록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일상은 다시 읽기에서 정리하기로, 그리고 다시 읽기를 넘나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추억이 그대로 오늘이 된 곳
시인에게 인천의 의미를 묻자, 그는 어려운 질문이라고 답했다. 인천을 거의 떠나지 않았던(군대 3년, 그리고 서울에서 1년, 부천에서 1년을 살았다.) 인천 토박이인 그에게, 인천은 그저 매일의 일상을 함께하는 공기와 같은 곳이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나들이를 하면 발길마저 가벼운 것처럼, 인천은 그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렇게 어쩌다 한번 그런 질문이 던져질 때면, 오히려 그제야 그것이 실감으로 다가온다고. 그러니 한 마디로 쉽게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우문현답이었다.
그럼에도 한번 터져 나온 이야기보따리는 멈추질 않았다. 아직 인천이, 아니 동인천이, 제물포가, 아니 그보다는 신포동이, 바닷가 소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때부터 그의 시간은 오직 이곳에 푹 젖어 있었으니 말이다. 제물포역 앞에 쭉 늘어져 있던 배밭에서부터 인천의 곳곳에 있던 수많은 극장들. 그곳에서 보았던 영화, 그리고 때로는 빨간딱지의 외설물들까지. 인천은 그의 추억이 잠든 곳이고, 새로운 만들어지는 곳이며, 그래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필자가 제3의 시선으로 김윤식 시인에게 있어서 인천의 의미는 이쯤 되지 않을까 가늠해 본다. 그것은 아마도 ‘추억이 그대로 오늘이 된 곳,’ 그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인천, 그리고 신포동과 함께할 테니 말이다.
덜컥 수상한 교내 백일장, 운명 같은 문예반 생활
기왕에 추억의 보따리가 열린 김에 문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때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저 책 읽기를 좋아하던 그가 덜컥 교내 백일장에서 수상을 한 것이다. 「파랑새」라는 당선작이 문예반 선생님의 눈에 띄면서 문예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것이 계속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잡지 학원에 몇 번인가 글이 뽑히기도 하였다. 그 덕에 전국에서 오는 여학생들의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며 소년처럼 웃음을 지었다.
시가 계기가 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시로 등단했지만, 산문에 대한 욕심은 꾸준히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인천과 관련된 산문을 쓰는 것은 그의 20여 년 작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특이하게도 머릿속에 인천이라는 도시의 기억이 사진처럼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단지 몇 개 건물이 어디에 있었다가 아니라, 골목과 골목을 따라 즐비한 식당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풍경, 거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기억을 사진으로 인화할 수는 없지만, 글로 써낼 수는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만 시인은 그것을 그림이나 사진처럼 생생히 표현할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가 최근에 출판한 『인천의 향토음식』은 그러한 기억의 결과물이다.
김윤식, 『인천의 향토음식』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21) |
자신만의 고유색을 가진 도시가 되길
그가 꿈꾸는 인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인천문화재단의 대표이사를 역임한 그였기에 현재의 인천에 어떤 예술적 감각을 입힐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그는 한 마디로 작은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커다랗고 멋들어진 건물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어지는, 사람의 삶과 일상이 살아있는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일상이 색을 입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면서 맹인 점자, 훈맹정음을 펴낸 송암 박두성 선생의 예를 들었다. 선생의 집을 찾아오는 맹인들은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 집을 찾기가 아주 쉬웠다고 한다. 길에서 누구라도 붙잡고 “여기 태극무늬가 크게 그려진 대문 있는 집이 어디요?”라고 물으면 누구나 알려주는 집. 그 집이 바로 선생의 댁이었다고 한다. 김윤식 시인은 행복복지센터나 여러 관공서에도 이러한 특징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할 곳들이 타지사람이 쉽게 찾을 수 없으면 되겠냐는 그의 말이 비근한 예이지만 묵직하다.
예술가로서 선택한 길을 꿋꿋하게 짊어질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코로나 시대를 관통해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지금, 후배 문화예술인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시인은 어렵게 견뎌온 모든 예술인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며, 또한 다시금 견뎌야 하는 시절임을 기억하자는 당부를 함께 건네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결국 우리를 지탱한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이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것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자기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이 복합된 것이리라.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다짐을 한 마디 더한다. 예술인으로서 살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그 길이 결코 빛나고 행복한 길이 아니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선택한 것임을, 그러므로 그 선택에 혼을 바침으로써 ‘위대한’ 예술인이 될 것임을.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