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집으로: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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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집으로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2021)

차한비(영화웹진 리버스 기자)

재복(이봉하)에게는 집이 둘이다. 20년 동안 일한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받은 후, 재복은 동료와 함께 거리에 집을 지었다. 천막 앞에는 “부당해고 철회하라”라는 현수막과 농성 기간을 알려주는 날짜 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늘로 1882일째,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며 재복은 천막생활에 익숙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전단을 건네고, 가위로 양파를 툭툭 잘라 넣어 찌개를 끓인다. 능숙하게 요리하는 재복 옆에서 만용(황정용)은 구멍 난 천막에 청테이프를 잘라 붙인다. 재복은 만용에게 뭘 그리 애쓰냐며 구시렁대다가 입을 다문다. 언젠가는 그만둘 투쟁이고, 이대로 천막에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다만 언제쯤 떠날 수 있을지, 그 시점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마음은 무거워져만 간다.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 러닝타임 81분, 개봉 2021.10.21.)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고, 여전히 하고 있다. 1인 시위, 집회, 문화제, 고공농성, 연대 행사, 그리고 소송. 헛되이 쓴 날은 하루도 없다. 온갖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운 달력이 야속해 보이는 이유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아서다. 희망을 걸었던 재판에서 패소한 후 천막에는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애초 잘못 들어선 길이 아니었나 하는 불안과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원망이 뒤엉키다 보니 언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홧김에 천막을 나온 재복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결국 다시 천막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한다. 그날 밤, 만용과 영석(서광택)은 휴가를 결정한다.

“우리라고 휴가 못 가나?” 만용은 덤덤히 묻는다. 노동자에게 휴가가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면, 이들에게 휴가란 일상이 된 싸움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일이다. 노동자라는 신분을 되찾으려는 길고 막막한 투쟁, 거기서 잠시 빠져나온 재복은 또 다른 집을 찾아간다. 현희(김정연)와 현빈(이승주), 두 딸은 재복을 반기지 않는다. 재복이 천막에서 먹고 자는 동안, 현희와 현빈은 양육자 없이 살아가는 데에 적응해야 했다. 아빠가 집을 떠날 때 각각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들은 이제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과 중학생이 되었다. 울어도 달래주는 부모가 없어서,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돈을 벌어 사야 해서 아이들은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렸다.

영화 <휴가>의 한 장면

현희와 현빈은 재복을 피한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입 밖으로 원망을 쏟아낼까 봐, 그간 참아왔던 마음이 무너질까 봐 꾸역꾸역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봄이 모자란 흔적은 집안에도 가득하다. 재복은 막힌 싱크대를 뚫고 말없이 냉장고를 닦는다. 재복이 차려주는 밥상을 마다한 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현희가 수시 합격 소식을 전한다. 목소리에는 기쁨 대신 걱정과 의심이 묻어난다. 다음 주까지 대학교에 등록 예치금 30만 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말에 재복은 큰소리를 치지만, 이제 서울에 가지 말라는 현희의 요구에는 말끝을 흐린다.

일, 그것은 재복에게 무슨 의미일까. 일할 때 재복은 정직한 노동자였고, 떳떳한 아버지였다. 유능한 기술자였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자리가 분명한 시민이었다. 정리해고는 그토록 선명하고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휴가>는 재복이 투쟁을 결심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현재 그가 상실하고 또 감내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일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고자 분투하는 동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는 서서히 금이 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투쟁해봤자 누가 알아주기나 하느냐며 농담 섞인 핀잔을 내뱉는다. 투쟁을 지속하는 이유와 투쟁을 관두어야 할 이유는 그렇게나 맞닿아서 재복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운다.

하지만 서럽고 막막할지언정 5년이라는 시간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아서, 재복은 쉽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 재복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들과 달리, 재복에게 휴가란 잠시 일을 재개하는 기간이다. 현희에게 예치금을 마련해주고 현빈이 입을 겨울 점퍼를 사기 위해 재복은 동창 우진(신운섭)이 운영하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때 재복은 강제 추방당한 외국인 노동자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그곳에서 자신보다 한참 어린 두 노동자를 만난다. 목수로 일하는 청년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봐 산업재해 신청을 두려워하고, 한 마이스터고등학교 학생은 전공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터를 배정받는다. 재복은 어느 날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두 노동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영화 <휴가>의 한 장면

이처럼 <휴가>는 노동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연결하며, 일과 일하는 사람에 관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배우이자 감독인 이란희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 세 사람이 직접 출연하여 본인을 연기했던 단편 <천막>(2016)을 확장한 작품이다. 전작이 천막에서 농성을 이어가는 세 인물을 통해 일상으로 자리 잡은 투쟁의 풍경을 담았다면, <휴가>는 천막을 벗어난 재복을 중심으로 일상과 투쟁의 경계를 묻는다.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는 한, 재복에게 천막은 또 하나의 집이다.

재복은 두 딸의 냉장고를 가득 채워 넣고, 두 동료가 먹을 도시락을 싼 다음에 문을 나선다. 집을 떠나고 집을 거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는 이러한 짤막한 여정에 동행하며, 싸우는 사람이 끝내 도착할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묵직한 필치로 그려낸다.

차한비(CHA Hanbi)

영화웹진 『REVERSE』 기자이며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발간 연구 저널 『ACT!』 편집위원이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을 지내고, 독립영화 매거진 『Motion』의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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