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속에서 상상의 세계로2021 연수문화재단 금요예술무대 #플래잉연수 <우산도둑>
엄현희(연극평론가)
스튜디오 나나다시의 <우산도둑>(장성희, 김예나 작/김예나 연출)이 ‘2021 연수문화재단 금요예술무대 #플래잉연수’ 5월 공연으로 선보였다. 2018년에 초연(初演)된 <우산도둑>은 서울어린이연극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은, 어린이 대상의 명작 공연이다. 이번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연수아트홀에 많은 어린이 관객들이 모인 것을 보니, 그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은 어린이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려, 어린이 관객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천천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말이다.
2021 연수문화재단 금요예술무대 #플래잉연수 <우산도둑>, 스튜디오 나나다시연수아트홀, 2021.5.28. (사진: 연수문화재단) |
사실 연극 한 편이 어린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며, 어떠한 기억으로 남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수많은 문화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 연극은 특별히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예술이다. 오히려 연극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혹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느끼도록 하는 ‘인간적인 경험’을 권유하는 예술이다. 어린이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산도둑>은 작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만일 우산이 없는 마을이 있다면, 우산을 보게 되었을 때 무엇을 생각할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질문일까. 하지만 <우산도둑>이 설정한 특수한 상황은 관객들 개인에게 어떤 기억을 건드린다. 생애 첫 우산을 가졌을 때의 소중한 기억들, 혹은 특별히 아끼는 우산을 가지게 되었을 때를 어렴풋이 떠올리도록 한다. 무심히 지나친 어떤 순간을 환기시키며, 연극은 잠시 멈춤 속에서 여러 가지 상상을 펼쳐낸다. 관객들도 잠시 멈춤 속에서 어렸을 적의 특별한 우산을 만났을 때의 감동을 비롯해 몽상에 빠지게 된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우산도둑>은 그러한 순간을 잘 포착한 작품이다.
<우산도둑>의 한 장면 (사진: 연수문화재단) |
<우산도둑>의 창작진 ‘스튜디오 나나다시’는 연수아트홀 무대를 충분히 넓게 사용한다. 양옆에서 이야기꾼이 장면을 이끌어가며, 무대 중앙에서 배우들에 의해 주요 장면들이 펼쳐진다. 주로 키리마마의 친구 차쭈의 찻상 등의 장면이나 도시 장면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극장의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낮추려는 운동)로 꾸려졌다. 수어 통역자가 이야기꾼의 역할을 함께 하며, 극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우산이 없는 마을에 사는 키리마마란 소년은 도시에 나가 우산을 처음 보고, 우산을 사서 집에 돌아온다. 하지만 우산은 자꾸 없어지고, 키리마마는 점점 화가 나 우산보다 우산도둑을 잡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사실 우산도둑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키리마마의 원숭이 친구가 도둑이었고, 원숭이는 단지 호기심에 우산을 훔친 것이었다.
<우산도둑>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하지만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연극 관람의 전부가 아니다. 원숭이가 우산을 훔쳐가는 것도 중간부터 이미 관객들에게 알려지며, 도둑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만들지 않는다. 작품은 이 내용을 배우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펼쳐내며 관객들과 호흡한다. <우산도둑>은 장면마다 배우들의 신체와 상상력, 호흡과 타이밍, 인형 연기 등의 연극적 언어가 충만한 무대를 선보인다.
<우산도둑>의 한 장면 (사진: 연수문화재단) |
작품은 배우들의 신체를 최대한 활용한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진행하며, 마을 아이 배역들은 대사가 거의 없거나 짧은 편이다. 마을의 친구들이 한데 모여 차를 마시는 장면은 연극이 끝나도 오래도록 남는 잔상이다. 침착하고 조용한 차쥬, 기운차고 씩씩한 키리마마, 호기심 많은 원숭이 친구까지 모두는 각자의 성격에 걸맞게 움직이며, 찻상 앞에서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다. <우산도둑>이 보여주는 연극적 언어들은 많은 연습과 훈련 속에서 나온 것으로, 무엇보다 배우들이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데 뛰어난 감각을 보여줘 인상적이다. 어린이 관객들과 어떻게 만날지를 고민하고 적정한 수위를 찾아 조절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친구들 각각의 캐릭터들이 살아있으며, 특히 원숭이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극 연기까지 높은 수준으로 선보인다.
<우산도둑>은 관객이 연극에 몰입하며 적절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연출하였다. 이야기꾼이 극장에 모인 어린이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걸며, 다음의 스토리 내용이나 질문을 유도한다. 만일 작품 내의 인물들이 극장의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건다면, 극 세계의 밀도가 깨질 것이다. 이 부분도 영리하게 처리해 관객의 참여를 끌어들여 오히려 작품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방향을 보여주었다. 극장에 모인 어린이 관객들은 이야기꾼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극에 기꺼이 참여했다.
<우산도둑>의 한 장면 (사진: 연수문화재단) |
작품은 마지막에 원숭이 친구가 그동안 훔친 우산들이 활짝 펼쳐진 채 무대 뒤편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여준다. 키리마마는 도시에서 우산을 처음 보았을 때, “비가 내리니까 여기저기에서 꽃이 활짝 피는 것 같아.”라며 우산에 대한 감동을 말했다. 그리고 우산을 처음 썼을 때 “우산 속에서 들어보니 빗방울들이 음악을 들려줘.”라고 이야기한다. 축축하고 몸을 적시는 비가 내릴 때, 기분이 불쾌해지거나 불편함을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산도둑>을 보고 난 이후라면, 비가 올 때마다 무대 뒤편에 가득히 피어난 우산 꽃들이 기억나며, 남몰래 우산 속에서 ‘토도독!’ 빗방울들의 노래를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엄현희(嚴鉉熙, Um Hyun Hee)
연극평론가. 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 『기록, 성장, 연극』(2018)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