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김창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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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도시인문학자 김창수

김창수 : 문학평론가, 前 인천연구원 부원장

도시인문학자로서 오랜 시간 인천을 연구하였다. 인천학연구원의 상임연구원을 거쳐 인천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과 도시정보센터장, 부원장 등을 역임하며 인문학적 관점 위에서 인천이라는 도시를 연구해왔다. 지난 2019년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한 이후 ‘자유인’을 자처하며 강의와 집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본 인터뷰는 2단계 상황에서 진행되었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방역을 준수하기 위해 실시간 화상회의를 통해 진행되었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코로나19가 너무 심해져서 화상회의를 통해 뵙게 되니까 아쉽지만, 또 화상회의는 이 나름대로 새로운 분위기가 있네요.

김: 요즘은 강의도 회의도 줌으로 하니 적응이 된 것 같아요.

류: 저도 아무래도 지난 1년을 거의 줌으로 수업을 하다보니까 이제는 줌으로 회의하고 사람 만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하신 후에 처음 뵈었는데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하신 지 꼭 1년인데 퇴임 이후의 근황을 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예, 대부분을 집에서 보냅니다. 못 보던 책을 마음껏 읽고, 평소에 쓰고 싶었던 글도 좀 쓰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평생 잘 안 했던 것들을 마음껏 하고 있어요. 설거지와 방청소 같은 것도 잘하고요. 최근에 쓰레기가 갑자기 너무 많아져서, 아무래도 배달을 많이 시키다 보니까, 분리수거도 열심히 하고, 아주 가정적으로! 지내고 있어요.

류: 저와 생활이 비슷하시네요. 아무래도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김: 작년 12월에 퇴임할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서 인천 지인들과 모여서 출판기념회를 겸해서 약간의 포부를 밝혔던 바 있어요. 좀 자유로워지겠다. 자유인이 되겠다. 책으로부터의 자유, 자료로부터의 자유 이런 것을 말했는데. (웃음) 그리고 발로 걸으면서 살아보겠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때 계획은 전국의 주요 도시를 1주일씩 둘러보자, 뭐 이런 계획을 세웠었죠. 왜냐하면 우리가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데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안의 도시를 안 가본 경우가 많거든요. 일하러 다니거나 기껏 저녁이나 먹거나, 아니면 그냥 돌아오고. 이런 식으로 살아왔더라고요. 내가 특별히 애국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해서 무심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실행을 못했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다녀왔어요. 강원도 영월, 경북 영양, 이런 곳을 다녀왔어요. 제가 어릴 적에 영양 근처에서 좀 산 적도 있었고, 영양은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고 소설가 이문열도 살고 그랬던 곳이거든요. 대구도 잠깐 다녀왔어요. 그때가 대구에 코로나가 확 휩쓸고 지나간 다음이었는데 대구 사람들이 상처도 많고 고생도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코로나 때문에 용두사미가 된 계획이죠. 그 대신 다섯 편 정도의 글을 썼어요. 그동안 많은 글을 썼지만 다 청탁받아서 쓴 것들이라, 글을 다 쓰고도 늘 미진한 점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죠. 청탁받은 글도 제 생각이 담긴 제 글이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벗어나기 어려워요. 거기다가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태반이고요. 그렇게 쓴 글은 애착이 가지 않죠.

류: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죠. (웃음)

김: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나오는 우물 같아요. 어쩐지 미워져서 돌아갔다 가엾어져서 또 돌아오고. 그렇게 청탁받아 쓰는 글쓰기가 완전히 자발적이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퇴직한 후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고, 시간적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조지훈 론을 비롯해서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을 몇 편 썼어요. 그것이 그나마 위기 속에서 찾은 작은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류: 위기 속의 보람이라는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어떤 글을 쓰셨는지, 혹은 앞으로 어떤 글을 더 쓰고 싶으신지요?

김: 최근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를 다시 읽고 있어요. 이건 사실 개인적인 부채 상환의 의미도 있어요. 조병화 시인은 경희대에서 인하대로 옮겨오시면서 국문과와 문과대를 창설한 주역으로 문과대 학장, 대학원장직을 맡으셨죠. 당시에 학생들 중에 시인 지망생은 많았지만, 평론을 하겠다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었던 희소가치 탓이었는지 자상하게 대해 주셨어요. 새 책이 출판되면 늘 연구실로 불러서 서명을 해서 주시고, 원고 정리를 도와 드리면 꼭 밥을 사주셨죠. 내동 입구에 있는 주점 ‘힐사이드’에서 맥주도 종종 사주셨고… 정년퇴임을 하시고 학교를 떠나실 때 담배 파이프 하나를 정표로 주시기도 했죠. 그런데 리얼리즘으로 작품을 보던 때라 센티멘털리즘이 강한 그의 시풍에 대해서는 내심 불만이었어요. 실은 선생님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 본적도 없었고요. 작고하시고 난 뒤에야 『버리고 싶은 유산』, 『하루만의 위안』, 『인간고도』 등의 초기 시집을 다시 읽었어요. 그때서야 한국전쟁 무렵의 인천 풍경 속에 그의 인간적 외로움도 손에 잡힐 듯 다가오더군요.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를 다시 읽기가 올 연말 계획입니다. 글 한 편으로 베풀어 준 그 마음을 다 갚을 수야 없겠지만 말입니다.

류: 글이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아무래도 은사님이셨으니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짧게 하나만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김: 하나만 이야기하면 조병화 시인이 원래 전공이 화학이었어요.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나오셨거든요. 순수화학자였죠. 처음에 인천 제물포고에 수학교사로 오시면서 인천과 인연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여러 교과를 다 가르치셨다고 해요. 거기에다 특기가 럭비였다고 해요. 그래서 제물포고에 럭비부를 창설 전국대회를 석권하기도 했다 합니다. 화학교사와 럭비선수는 조병화 시인의 ‘딴 얼굴’이죠. 부인은 또 인천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하셨죠. 성함이 김준이신데 김준 산부인과병원 2층이 인천 문인들의 회의실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류: 정말 인천이랑 인연이 깊으셨군요. 일종의 인천 예술인들 아지트였군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을 텐데, 여기서 다 여쭐 수 없어서 아쉽네요. 이 궁금증은 선생님의 글을 통해 해소해야겠습니다. 다시 선생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여쭙겠습니다. 인천연구원에 오래 계셨는데 연구원에 대해 소개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김: 인천연구원은 인천광역시가 1995년에 설립한 정책연구기관이에요. 인천시의 행정, 도시계획, 산업경제, 교통, 물류, 문화관광, 교육, 평화도시전략 등의 연구를 하고 있는 곳이죠. 연구자들이 100여 명. 주제 현황에 따라 협력연구를 하기도 하고. 현안연구, 비전연구, 정책기초연구 그런 것들을 하는 곳이에요. 가령 현재의 보도에 계속 나오고 있는 쓰레기매립지 같은 것과 관련된 연구들. 이렇게 여러 분야와 협업으로 연구단 구성해서 연구해야 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곳이 인천연구원이죠. 인천의 Think Tank 역할을 하는 곳이죠. 거기서 나는 주로 문화정책을 담당했고, 도시인문학센터장으로 있기도 했고요.

류: 그렇다면 거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도시인문학센터와 관련된 일이었겠군요.

김: 인문도시연구총서를 만든 것이 가장 기억이 남아요. 이 기획은 도시의 변화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을 남기는 거였어요. 어부, 염부, 목공장인, 철공장인, 주물장인. 이런 분들의 구술을 기록하는 사업이었죠. 인천이 가지고 있는 도시인문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었죠.
이색적인 연구로는 아시안게임이 인천에 있었을 때, 성화 봉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을 담당하기도 했어요. 성화 봉송과 관련된 국제적인 루트를 짜면서 한국의 옛길을 활용한 성화 봉송 계획서를 쓰기도 했었죠.
또 5년 전에는 유네스코 책의 수도 사업과 관련해서 전체 마스터 플랜을 짜기도 했어요. 그것이 그대로 다 실행된 건 아니었지만, 밑그림을 그려봤다는 데 의미를 가진 작업이었죠.
퇴직 직전에 인천 평화도시 전략연구라는 좀 큰 규모의 사업을 마치고 나왔어요.
또 인천연구원에서 발간하는 『IDI 도시연구』를 거의 10년을 담당했는데, 2016년 9월 등재후보지가 되었고 2020년부터 등재지로 확정되었어요. 2019년 퇴직할 때 마무리까지 깨끗하게 하고 나와서 마음이 편했죠.

류: 등재지 작업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학술지 하나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는데요. 그 일을 10년 넘게 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인천연구원 얘기를 하다 보니 제가 진짜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김: 그럼요.

류: 인천연구원이 원래는 인천발전연구원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께서는 문학평론가였잖아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선생님께서 인천발전연구원으로 가셨다고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지금이야 인천연구원이니까 어색함이 전혀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학연구자와는 좀 상관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어떤 계기로 인천발전연구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신 건지 궁금했어요.

김: 류 선생이 보기엔 내가 문학연구자나 문학평론가로서 먼저 다가왔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에도 스스로 도시인문학 연구자라고 자임해 왔어요. 이미 인천학연구원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도시인문학자로 살았으니까요.
확실히 발전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외적 성장주의라는 느낌이 강해서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처음 내가 인천발전연구원에 가려고 했을 때, 당시 인천은 외적성장주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대였고, 도시정책에 있어서도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던 시기였어요. 물론 여전히 성장주의가 주류였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한 지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들어갈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 인천발전연구원에서 ‘발전’을 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도시의 외적 발전만이 아니라 주민의 삶, 상태, 환경 등 지속가능한 패러다임이 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도시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인천연구원에서 일을 했지요.

류: 확실히 발전이라는 말을 떼어냄으로써 인천연구원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느낌이 드네요.

김: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위해서는 타 학문과의 협력연구가 필요잖아요. 그런 협력조건을 인천발전연구원이 잘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인천발전연구원에서 연구하면서 여러 현안과 쟁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이게 내가 입사 때 인터뷰했던 얘기인데, 인터뷰에서도 소신을 펼쳐보라는 얘기를 들었고, 또 들어가자마자 도시인문학센터를 바로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죠.

류: 정말 그렇군요. 사실 인천이라는 도시 자체가 가진 매력을 가장 열심히 발굴하고 축적하는 곳이 인천연구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러한 인천이라는 도시는 근대문학의 태동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인천이라는 도시와 문학, 양자 사이의 연계를 잡아오신 선생님께서 보시는 문학・문화적 공간으로서 인천이 가진 매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 먼저 인천은 한국 근대의 실험실 같은 곳이죠. 한국 근대의 미니어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게 내가 인천의 도시라는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천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겪은 근대, 한국만이 아닌 아시아의 근대가 녹아나 있어요. 이걸 보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사 이후 10년을 진짜 인천과 관련된 자료더미에 빠져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잉될 정도로 인천에 빠져 있었지요.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오늘의 삶까지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쟁과 도시화 속에서도 여전히 구도심에는 변화된 시간/역사/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그리고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 그들의 문화, 다양성, 축적된 다문화 이런 것들이 켜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도요. 그러나 향토주의에 갇히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근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전형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건 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인천이라는 곳은 과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근대 시기에 여기에는 세계의 축도가 있었거든요. 청국조계, 일본조계, 각국조계까지. 세계의 미니어처, 여기가 곧 세계였던 거죠. 김소월이나 김동환의 시, 김기림의 <인천항 연작시> 같은 시가 곧 인천에서 느낀 세계를 담아낸 것입니다. 또 배인철 같은 시인은 아주 이른 시기에 소수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 의식을 담고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었고요. 이것들은 모두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함께 문학적으로 깊은 인식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등의식, 소수자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이요. 이상의 「지주회시」 같은 것도, 강경애 『인간문제』, 이태준 「밤길」, 이규원 『해방공장』, 조세희나 방현석의 소설 등, 이 도시와 교호하면서 작가들의 의식이 깊어진 거죠. 많은 작가들이 인천을 작품화했고, 인천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창조 현장이었던 거죠. 인천에 다녀간 외국이나 외지인들 그리고 작가들의 인천 방문기를 정리하면서 그들의 의식에서 ‘세계의 미니어처 혹은 근대의 실험실’로서의 인천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년쯤 인천 문화사의 정수로서 인천문학의 변모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류: 인천이 다양한 매력과 저력을 가진 도시라는 것이 근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확인되어왔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의 작업들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될 것 같네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이 인터뷰는 인천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인천문화통신 3.0>에 실릴 글인데요.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김: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의 여러 분야의 분들이 힘을 모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99년에 저는 인천문화정책 연구소장이었는데 당시에 인하대 최원식 교수님이 주도하고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인천 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의 간사로서 함께 했어요. 그때 문화재단의 필요성을 외쳤지요. 그 노력이 인천문화재단 설립으로 이어진 성과를 낸 거지요. 제가 주역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인천문화재단 설립에 따른 조역으로 참여했다고 할 수 있지요.

류: 조역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모두가 주역이셨던 거죠.

김: 문화정책연구소 할 때 우현학술제를 여러 해 개최했는데, 이것이 문화재단 사업으로 이어기도 했죠. 2005년 우현 고유섭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이후 재단에서 행사를 이어가는 것으로 공식화되었어요. 그게 제도화되고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깊은 인연이지요. 또 2006년에는 자유공원의 역사적 변천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기획했고, 나중에 『만국공원의 기억』 같은 책을 내기도 했어요. 인천문화재단 설립 초기에 봉사자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0년부터 4년 동안 문화재단 4기, 5기 이사로 있기도 했군요.

류: 인천문화재단의 설립 전부터 함께 해온 산 증인이시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인천의 문화정책을 오랫동안 현장에서 지켜보신 전문가이자 어른으로서 재단의 발전을 위해 조언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연초부터 화두가 되었던 것이 이른바 문화재단 ‘혁신’이었는데, 그 결과는 기대 미흡이라는 것이 중론인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혁신을 하려면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목적을 앞세우거나 이해에 집착하면서 혁신의 가닥을 잡을 수 없어요. 대표이사 추천제나 인사 문제를 중심에 놓고서는 혁신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대원칙을 검토하고 합의해나가면서 합의한 원칙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역문화진흥을 위해 전문성과 독립성을 기초로 운영되는 문화 지원기구입니다. 오히려 문화재단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필요하지만, 재단의 독립성이나 전문성을 후퇴시키는 우를 범한다면 혁신이라 하기 어렵죠. 인천시는 문화재단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혁신의 진정한 동력도 결국 재단 내부로부터 문화계의 동의로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류: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 내주시고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나눈 대화만으로도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수연(문학평론가, 인하대 프런티어 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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