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를 좁혀, 경계 위를 걸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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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를 좁혀, 경계 위를 걸어가다.
제 4회 디아스포라영화제(9.2~9.4, 인천아트플랫폼 일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 모든 적은 한때 친구였다 /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 고요히 칼을 버리고 / 세상의 거지들은 다 /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 어떻게 눈물이 햇살이 되겠는가 /어떻게 상처가 잎새가 되겠는가’
– 정호승, ‘나뭇잎 사이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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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간다’는 표현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좁은 틈을 포용하는 여유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 사이의 좁은 틈을 포용할 때에 비로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 4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사이’에 집중해보자는 의미에서 ‘사이를 걷는’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스어로 ‘흩어지다’, ‘퍼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스포라는 원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인천은 한국 최초의 이민이 시작된 도시이며 장기 체류 외국인이 7만 명을 넘어서는 만큼 ‘디아스포라의 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제에 와보고서야 알게 됐다.

인천영상위원회와 인천문화재단이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제 4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지난 9월 2일부터 4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열렸다. 다양한 층위의 디아스포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들과 함께, 감독, 작가, 관련 연구자 등과 관객이 영화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토크’, 한국과 오키나와의 민요를 연주하는 칸류메이의 공연, 어쿠스틱 국악 그룹 다나루와 극단 앤드시어터의 퍼포먼스, 유럽의 난민문제부터 새터민들의 삶에 대해 고민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의 <여기와 저기사이> 전시, 재일조선인 2세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온 서경식 교수의 특별강의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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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에서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흩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를 통해 소개되었다. 개막작인 <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연출 김하경 달린)는 1905년 한국을 떠나 멕시코로 이주한 사람들의 사연과 그 후손들의 증언들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로, 스크린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분할된 화면과 자막 등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달했다. 상영작 <거미의 땅>(연출 김동령, 박경태)은 폐허가 된 의정부 미군 기지촌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세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두 영화는 역사가 외면하고 사람들이 망각했지만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전통적 의미의 디아스포라를 담은 영화 이외에도, 계급, 인종, 민족, 소수자 등 다양한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떠도는 사람들에 주목한 현대적 디아스포라에 관한 영화들도 소개되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다섯 명의 단짝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월미도와 동인천 일대의 15년 전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는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며 지금은 많이 달라진 동네의 모습과 비교하는 쏠쏠한 재미도 제공했다. 그러나 동네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청춘들의 고민은 같은 모습이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 청춘들이 살아온 터전은 여전히 그들에게 정착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방황하는 청춘들은 먼 곳으로 떠나기를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1년에 만들어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2016년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된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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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영화제의 특별한 상영회, 이주민 대상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 <영화, 소(疎)란(LAN)>에서 완성된 영화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혼이주가정, 화교, 유학생 등 인천지역 디아스포라로 구성된 팀들을 대상으로 5개월간 진행된 영화 제작워크숍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각각 청소년들의 고민, 한국에서 겪은 소통의 어려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화, 소(疎)란(LAN)>의 작품들은 다른 얼굴, 다른 언어를 가졌다는 이유로 낯설게만 바라보았던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베트남예술단 무지개언덕 팀이 만든 <705호의 일요일>은 한국어 수업에 참여하게 된 각자의 사연을 영화로 구성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선주민이지만, 다른 지역의 이주민이 된다면 우리도 똑같이 겪을 수 있는 그들의 사연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천화교중산중학 여채현 학생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영화도 찍고 소통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어 행복했고, 직접 만든 작품을 완성시켜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 있어 더 뜻깊었다.”며 <영화, 소(疎)란(LAN)>에 참여한 소감을 또랑또랑하게 말하기도 했다. 수업을 진행한 인천여성영화제 라정민 씨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중도 입국한 청년들이 모인 새꿈학교의 경우 한국어가 능숙한 친구들이 별로 없어 지난해에는 그림을 그려 소통하기도 했는데 올해는 한국어가 많이 늘어 촬영이 수월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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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이 좁을수록, 사이가 가까울수록, 마찰과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의 사이에 놓인 좁은 틈을 견디지 못해 자꾸만 사이를 넓히려고만 한다면 점점 경계는 명확해지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은 위험해진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좁은 틈을 포용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 모두는 눈물을 햇살로 만들고, 상처를 잎새로 만드는, 서로를 치유하고 치유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 4회 디아스포라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현대사회의 디아스포라,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틈을 좁히는 방법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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