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일기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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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을 적는 개인의 기록입니다. 단순 기재가 아닌 한 가지 주제에 깊이 있게 천착하는 행위에 가깝죠. 어떤 매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림일기, 영상일기, 사진일기 등으로 소개됩니다. 장소성을 부여해 산중일기, 전주일기, 상하이일기 등으로 나열될 수도 있죠. 취재일기, 교단일기, 임신일기, 육아일기처럼 자기만의 형식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나 괴벨스 일기처럼 사람과 함께 명명된 일기도 있고요. 흔히 글쓰기를 스스로 사유하고 내면화하는 작업의 출발이라고 하는데, 일기쓰기가 대표적입니다.

 출처:오마이뉴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스승 랠프 윌도 에머슨에게 “이제 무엇을 할 거니? 일기는 쓰고 있니?”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일기를 썼습니다. 1837년 스무 살의 소로는 첫 일기에 이렇게 적습니다.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에게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는 45년의 짧은 생애 동안 총 39권의 노트에 7,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삶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일기는 살아 있는 증언이자 내면 보고서라고 할 수 있죠.

자연에 대한 관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 독서 단상, 글쓰기의 고민과 절망 등이 그의 일기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산문 대신 시를 한 편 적어두기도 하고, 생각을 한두 문장으로 압축해놓기도 했습니다. ‘사랑의 병을 고치려 한다면 더욱 사랑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좋은 치유책이 없다’, ‘시는 이 땅에 온몸을 딛고 선 시인의 발밑에서 생겨난다’, ‘삶 자체를 꾸준히 살피고 있지 못할 때는 삶의 때가 덕지덕지 쌓여 삶 자체가 꾀죄죄해진다’소로의 일기 일부입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산문집『시절일기』를 통해 개인의 내면을 관통한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40대를 지나오며 고민했던 지난 10년간의 일기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세월호 참사, 문화계 블랙리스트, 촛불시위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작가는 끊임없이 문학의 역할에 관해 묻습니다.  

 
김연수(좌), 시절일기 표지(우)
출처:중앙일보

그는 일기쓰기를 ‘인생을 두 번 사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일기를 다시 보면 나를 객관화 시켜 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나에겐 절실한 문제였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매우 많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방법인 것 같다. 과거의 실수를 교정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상황은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 수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일기를 씀으로써 삶을 한 번 더 살 수 있고, 더 깊은 자기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송해나 씨는 지난해 1월부터 트위터에 ‘임신일기’를 썼습니다. 한국에 사는 30대 여성이자 임신한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것이죠.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팔로어가 1만 5천 명 가까이 늘었습니다. 트윗글을 모아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열 받아서 매일매일 써내려간 임신일기』를 펴냈는데 그녀는 이 책을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 소외에 대한 투쟁과 고발의 기록’이라고 소개합니다.

송 씨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현실을 언급합니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이 도입된 지 6년이 지났지만 출퇴근길,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임신부 배지를 달고 상대방에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요청해야 했고, 정말 임신한 거 맞느냐는 질문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듣기 싫었던 말들을 한 자 한 자 일기에 적었습니다. “애가 애를 가졌네”, “임신했다고 피해 의식이 너무 심해졌어”,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엄마라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야”, 배불뚝이, 배사장, 배장군 등 외모 비하 발언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일기 여행』은 일기쓰기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여성들의 여정이 담긴 책입니다. 저자 말린 쉬위는 ‘여성 일기 연구회’를 운영하며 여성들이 쓴 다양한 일기를 읽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회의 억압과 제약, 결혼과 양육, 삶에서의 크고 작은 선택 등 여성에게 주어진 문제를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 문학의 선구자인 버지니아 울프(1882~1941),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아나이스 닌(1903~1977)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자서전과 일기를 통해 그들의 삶과 창작 과정을 들여다봅니다. 이면을 돌아보고 상실을 위로하는 일기쓰기에 독자들이 동참하도록 권하고, 지금 당장 일기를 쓰도록 용기를 북돋웁니다. 수년간 일기를 써온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일기쓰기의 다양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출처:한겨레21, 뉴시스

‘양아록(養兒錄)’은 조선 중기 문신 이문건(李文楗)이 1551년(명종 6)부터 1566년(명종 21)까지 16년간 손자를 양육한 경험을 일기형식으로 적은 기록물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이자 조선시대 사대부가 쓴 유일한 육아일기이기도 합니다.

이문건(1494∼1567)은 16세기 중종, 명종 시대를 살아온 관료이자 학자입니다. 증조부 이함녕, 부친 이윤택과 백부 이윤식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명문가의 위치에 서게 됐죠. 이문건은 형 이충건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지만,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그의 인생도 위기를 맞게 됩니다. 옥사에 연루되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1527년 사면 후 이듬해 과거에 합격하지만, 정치 탄압에 불운까지 겹쳐 성주로 유배를 갑니다.

양아록을 쓰기 전, 이문건은 둘째 아들 온에 대한 기록을 ‘묵재일기’에 남겼습니다. 온은 어릴 때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이문건은 모자란 아들을 교육하기 위해 무지 애를 씁니다. 세월이 흘러 하나뿐인 아들 온이 손자를 낳습니다. 그때 이문건의 나이 58세였습니다. 양아록에는 손자 수봉이 16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과 훈육 등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사소한 병치레부터 육아의 구체적 상황과 체험, 손자의 안위를 염려하는 할아버지의 마음까지 진실하게 기록돼 있죠.

육아를 철저히 여성의 일로 치부한 조선 후기에 비해 조선전기는 선비가 육아일기를 쓰는 것이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또한 ‘양아록’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5년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시대 개인일기 1,500여 편을 정리하는 학술사업을 펼쳤습니다. 지난 6월에는 이 같은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조선시대 개인일기의 가치와 활용’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습니다. 심포지엄에서는 일기의 사료적 가치와 문화재 지정 기준, 일기를 편력(編曆), 표해록, 상소일기 등 11종의 세부 기준으로 새롭게 정리한 연구 등을 공개했습니다. 개인 일기가 한 시대를 보여주는 핵심 사료가 될 수 있음을 공표한 겁니다.

 ‘양아록’ 일부
출처:세계일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의 주인공은 안네 프랑크입니다. 안네 프랑크는 1929년 6월 12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만 13세 생일, 그녀는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유명한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공연히 울적한 기분이 들던 날,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는 옛말을 상기하고는 글쓰기로 결심하죠.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공장 창고에 8명이 함께 살아야 했던 갑갑한 상황에서 글쓰기는 그녀의 정신적 탈출구가 됩니다.

그녀는 1944년 8월 1일까지 약 3년간 매일 자신의 일상을 써 내려갑니다. 8월 4일 은신처가 발각되고 함께 있던 8명이 모두 잡혀갑니다. 안네는 아우슈비츠로 갔다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져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가 모든 이상(理想)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다니 놀랍다! 이상들은 너무 터무니없어 보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이상들에 매달리겠어.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고귀하다고 믿기 때문이야. (중략)이 학살도 곧 끝나, 평화와 평안이 돌아오겠지. 나는 그 기간 동안 내 이상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킬 거야.” 안네의 일기는 회사의 여비서가 발견해 보관해오다가 전쟁 후 아버지 오토 프랑크 씨에게 전해주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걸려있는 안네 프랑크
출처:조선비즈

‘나의 성추행은 허위’라며 고은 시인이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최 시인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5년 전 시인의 일기장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겁니다. 최 시인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성폭행 혐의를 받는 조재범 전 쇼트트랙 코치가 검찰로 송치된 데도 메모가 중요한 단서가 됐습니다. 심석희 선수가 남긴 일기 형식의 100쪽 분량 메모에는 성폭행 피해 당시의 장소와 일시, 심경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이 기계화될수록 일기쓰기와 메모 습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글 ․ 이미지/ 이재은 (뉴스큐레이션)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시절일기’ 펴낸 김연수 “일기 쓰기는 인생을 두 번 사는 방법”
중앙일보, 2019.7.2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나쁜’ 시절을 견디고 이해하고자 쓴 ‘일기’
한겨레, 2019.7.26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책에 없어서 쓴 임신부 ‘내 몸 일기’
한겨레21, 2019.7.1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詩心으로 보는 세상] 소로의 일기를 읽으며
농민신문, 2019.7.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조선 사신들 여정 빼곡히… “일기가 역사보다 생생했다”
동아일보, 2019.6.2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6. [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40) 안네 프랑크와 괴벨스의 일기… “기록해야 역사가 된다”
조선BIZ, 2019.5.1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7. 디지털시대의 일기(日記) 쓰기
경북도민일보, 2019.2.2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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