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변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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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 러시아 이름은 펜 바를렌(1916~1990). 1940년 러시아 최고 미술학교인 레핀아카데미에 한인 최초로 입학했습니다. 수석 졸업 후 1951년에 데생과 교수가 됐고요.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소련 주류사회에 진입했지만, 심한 인종차별을 받았고 조국이라고 여긴 북한에서는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합니다. 남한에서는 얼마 전까지 그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변월룡은 연해주 유랑 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학교 미술 교과서 삽화를 맡아 ‘월룡이는 자기가 그린 교과서로 공부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어릴 때부터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변월룡
출처 : 한국경제
  자화상(1963년. 미완성 작품)
출처 : 인천투데이

1953년 6월 그는 소련의 지시에 따라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됩니다. 북의 미술교육 재건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당초 3개월만 머물 예정이었으나 북한 당국이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을 맡기면서 체류 기간은 1년 3개월로 늘어납니다. 이 기간에 변월룡은 교재를 만들고 교육방식과 커리큘럼을 새로 짭니다.

변월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혁명 이념을 전파하는 선전미술은 물론 자신이 교류한 작가 및 예술가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습니다. 러시아 인민들의 삶의 현장과 한국전쟁 당시 포로교환 장면, 평양과 개성의 풍경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장르로는 유화·판화·데생·수채화·포스터를 아울렀고, 내용으로는 인물화·풍경화·전쟁화·역사화를 망라했습니다.

햇빛 찬란한 금강산, 캔버스에 유채, 1953
출처 : 연합뉴스

변월룡을 국내에 소개한 사람은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문영대 씨입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하던 1994년 그는 국립러시아미술관에서 우연히 변월룡의 그림을 봅니다.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 걸린 그림에 한국적인 정서가 배어 있었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과 아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절대 외국인이 그릴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색감과 비율이 느껴졌어요. 그때는 펜 바를렌이 고려인인지도 몰랐죠.”
이름을 메모했다가 수소문했고, 그가 레핀아카데미 교수였음을 알게 됩니다. 역시 화가인 아들 펜 세르게이를 찾아가 유족들이 보관해온 그림을 보면서 변월룡의 방대한 작품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2012년 문영대 씨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컬처그라퍼)이란 평전을 내면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의 첫 순서로 변월룡을 택하면서, 국내에 변월룡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봄에는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와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전시가 열렸습니다.

문영대 씨는 변월룡이 “통일 한국 미술사에서 남과 북을 잇는 연결 고리 구실을 할 작가”라고 강조합니다. “변월룡의 작품은 한국근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워줍니다.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을 배우면서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을 먼저 접한 작가들에 비해 러시아에서 활동한 그는 뿌리격인 리얼리즘 전통에 충실합니다.”

1960년 동판화 ‘북조선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출처 : 매일경제

변월룡이 그린 노동자들의 초상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선전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대상을 존중한 겁니다. 항구에서 일하는 고려인 여성 ‘한슈라’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노동 영웅처럼 중심에 크게 배치된 이 여인은 자녀를 많이 출산해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고려인입니다. 후덕한 여인의 건강한 미소를 엿볼 수 있죠. 작가는 평범한 노동자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정치적 목적에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을 담았습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
출처 : 중앙일보

변월룡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를 존경했지만 레핀대 동료들은 “동판화에 있어서만큼은 변월룡이 렘브란트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변월룡은 회화를 전공했으나 판화에도 애착이 있었고 특히 동판화 기술이 매우 훌륭했습니다. 들판의 버드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그린 ‘바람’(1959)은 섬세함과 역동성을 풍부하게 담아낸 수작으로 꼽힙니다.

변월룡의 동판화, ‘비(버드나무)’
출처 : 중앙일보

화가로서, 미술교육자로서 변월룡의 삶은 순탄했습니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의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나와 교수가 되었습니다. 레핀대 부교수에서 정교수가 되는 데 25년 걸리는 등 가슴 한편에 민족 차별의 응어리가 있었지만 미술가동맹회원으로 개인화실까지 배정받아 맘껏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도 참가했습니다.

전용 택시를 타고 출근할 정도로 작품이 잘 팔렸고, 사할린에서 포르투갈까지 유라시아 대부분 국가를 여행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두루 해외여행을 다닌 걸 두고 안톤 우스벤스키 국립러시아미술관 큐레이터는 “그가 정치적으로 신뢰받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변월룡은 1961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해마다 자신이 태어난 연해주 지방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와 조선이라는 두 개의 조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고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에도, 북에도 그가 스며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평생 한국식 이름을 고수했습니다. ‘변월룡’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뒤에도 곳곳에 우리말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풍경’ 부분 확대
출처 : kbs news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러시아 화가 변월룡을 한국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전시회 몇 번으로 선뜻 포용될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바라볼 수는 있을 겁니다. 냉전에 가려 지금껏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한 화가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힘, 그리고 대중의 관심 덕분입니다.

1990년 5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변월룡은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변월룡의 1985년 작품 ‘어머니’
출처:세계일보

글 /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분단의 비극이 낳은 ‘잊힌 거장’ 변월룡 개인전, 학고재에서
뉴스핌, 2019.4.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연해주 출신 천재미술가 변월룡 작품, 인천에 온다
인천투데이, 2019.5.2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소수 민족 차별을 넘어선 탁월한 필력…러시아서 되찾은 천재 한인 화가 변월룡
매일경제, 2019.4.2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고국이 버린 비운의 화가···그 작품 보러 관람객 몰렸다
중앙일보, 2019.5.1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남북이 모두 잊은 천재화가 ‘뻰 봐를렌’…변월룡을 만나다
연합뉴스, 2019.4.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6. ‘고려인 화가’ 변월룡의 삶과 숨은 이야기들
KBS News, 2016.3.26.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7. 변월룡, 사회주의 예술가의 휴머니즘
이데일리, 2019.5.1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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