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례(家家禮)는 집마다 예가 다름, 혹은 집마다 저마다의 절차와 규범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차림 예법을 상기해볼까요. 제사상은 북쪽에 놓아야 하며,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남쪽, 제사음식은 5열 차림으로 한다든가(1열에는 밥과 국, 2열에는 구이, 3열에는 두부나 고기, 4열에는 나물, 김치, 포, 마지막 5열에는 과일 등),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동조서율(대추는 동쪽 밤은 서쪽), 조율이시(서쪽부터 차례대로 대추-밤-배-감 순), 어동육서(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 등도 있습니다. 삼치, 갈치, 꽁치 등 ‘치’자가 들어간 생선은 상에 놓지 않는다든가 복숭아는 귀신 쫓는 음식이라 올리면 안 된다는 설도 있죠. 전통 상차림에 따르면 평균 35~40종의 제물을 차린다고 합니다.
출처: 매일경제
조선의 유학자들이 펴낸 예서(禮書)에는 어떻게 돼 있을까요? 2016년 ‘국학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한 관혼상제 전문가 김시덕 박사(56·대한민국역사박물관)는 “고려 말 들어온 주자의 ‘가례’ 이후 모든 예서가 ‘과, 과, 과, 과’입니다. 과일을 6종류 또는 4종류 올린다고 돼 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일을 놓아야 할지 정하진 않았어요. 조선 후기 학파와 무관하게 사용된 예서 사례편람(四禮便覽)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김 박사는 “19세기 중반에 쓰인 ‘금곡선생 문집’에 조율시이(棗栗柿梨)가 나오지만 이게 늘어놓는 순서는 아니다”며 “이전까지는 집에 있는 과일로 차리다가 19세기 들어서 네 종류의 과일이 상차림으로 정착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말리거나 묻어서 오래 보관이 가능했던 대추, 밤, 감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포는 왼쪽에, 젓갈류는 오른쪽에 하는 방식이 가가호호 퍼진 것은 1970년대 이후일 가능성이 큽니다. “1960년대부터 학자들이 전국을 돌며 제사 상차림을 조사했어요. ‘집안에 이러이러한 차림법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당시에는 없어도 이후로는 그렇게 차리게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조사자로부터 ‘역전파’가 된 겁니다.”
조율시이가 기록된 습례국 진설도. 191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동아일보
이이는 1577년에 간행한 『격몽요결』에서 제철 재료로 음식을 하되 별다른 게 없으면 떡과 과일 두어 가지만 올리면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추석 차례는 축문도 읽지 않고 술도 한 번만 올려 간소하게 지냈습니다. 한 해의 수확을 앞두고 별 탈 없음을 조상에게 알리는 의식에 가까웠죠. 추석은 농번기를 목전에 두고 모두가 쉬어가는 휴일이었던 겁니다. 1970년대 이후 대중매체가 추석 차례에 무슨 대단한 법도가 있는 듯 굴었으나 이는 소비사회를 맞아 새로 만들어진 전통입니다.
현대인의 삶의 문화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해마다 전통적인 제사 형식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전통’ 차례나 제사가 귀찮은 과거의 산물일지도 모르죠.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제안한 현대 제사상. 상차림을 간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출처:중앙일보
2004년부터 우리 전통 문화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대중에게 소개해온 (재)아름지기가 ‘가가례家家禮: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展을 열었습니다. 아름지기는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목표로 전통 장인 및 현대 작가들과 생활문화를 연구해왔습니다. 신연균 이사장은 “엄격한 제사의 본질과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되 현대에 맞는 적절한 형식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현대 제사 상차림을 제안한다”고 기획의도를 밝혔습니다. 핵가족과 1인 가족이 늘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공간도 원룸이나 아파트로 변했으며, 여행 중 또는 해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상황을 고려해 시대에 맞는 상차림과 풍경을 보여주는 거죠.
전시는 세 분야로 구성됩니다. 전통과 현대의 제사 음식 문화, 4가지 현대 제사상, 제사 문화 공예디자인이 그것입니다. 퇴계이황 종가의 불천위 제사와 명재윤증 종가의 제사상, 아파트에서의 제사상과 혼자서도 얼마든지 고인을 기릴 수 있는 1인 제사상도 있습니다. 지난 8일에 오픈한 전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계속됩니다.
이건민 산업디자이너가 제작한 ‘이동형 제기 세트’.
정해진 공간이 아닌 추모 공간이나 여행 중에도 손쉽게 제사상을 차릴 수 있다.
출처:중앙일보
전시장 곳곳에서 ‘현대인의 일상 공간과 삶의 모습에 맞도록 간소화한 제사상’을 볼 수 있는데요, 뷔페처럼 여러 음식을 그릇 하나에 모아 담거나, 병풍 대신 실내 가림막을 치고, 제사상을 따로 놓는 대신 식탁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유기나 목기로 된 제기 대신 평소에도 디저트 그릇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기와 유리 소재의 제기도 볼 수 있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할 때 쓸 수 있는 ‘이동형 제기 세트’도 있습니다. 접시, 술잔, 촛대, 젓가락을 고루 담되 서로 부딪쳐 깨지거나 소리가 나지 않도록 프레임에 고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네요.
신 이사장은 “제사는 조상을 섬길 뿐 아니라 가족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우리만의 문화와 정서를 담은 의식인데 본질은 사라지고 한 상 가득 차려야 한다는 가문의 허례허식만 남았다”며 “조선 시대에도 지역과 가문의 특색에 맞게 상차림을 하는 ‘가가례’가 제사의 기본 원칙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원은 “식생활이 변하면서 제물에도 변화가 생겼다”며 “이제 제사상에 바나나를 올리고, 겨울철에 수박과 참외를 차리는 경우도 흔하다. 또 커피, 사이다, 피자 등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추가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조상을 기리는 정성으로 차린 것이라면 나무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한학 연구자 이병혁 교수는 ‘한국의 전통 제사 의식’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옛날 제사음식도 그 당시에는 생활 음식이었다. 지금의 제사음식도 현재의 생활 음식과 가까워져야 한다”며 “시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전통만 강조하다가는 현실생활과 동떨어져 전통은 오히려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표했네요.
출처 : 국제뉴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명절 때마다 정부가 내놓는 물가 자료를 비판합니다.
“국가가 나서서 차례상을 세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우리는 유교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교 예법인 차례를 국가가 국민들에게 ‘이렇게 차려라’ 하고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크리스마스에 케이크 가격이 어떻다고 물가 자료를 안 내놓잖아요. 석가탄신일에 사찰의 시주금액이 얼마인지도 내놓지 않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차례상의 물가 자료를 내놓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들 처지에서는 차례상을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사과와 배는 추석에 나오기에는 이른 과일이며, 흔한 포도를 올리거나 가정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 예법을 지키던 이들은 양반들이었잖아요. 양반이 아니면 차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던 거죠.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 전체의 5~10%였습니다. 나머지는 상민이었으니 90% 이상의 사람들은 차례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계급 질서가 무너집니다. 양반이 약 70%가 되는 거죠. 자식을 많이 낳아서 늘어난 게 아니라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이죠.” 대다수가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했고, 유교 예법을 지키게 된 입장에서 자연스레 차례를 지내게 됐다는 겁니다.
“갑오경장을 통해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본격적으로 ‘모든 사람이 양반’이라는 인식이 퍼집니다. 해방 후에도 양반인 것처럼 행세해야 대접받는다고 생각해 양반이 해야 하는 차례를 지내게 된 거죠. 문제는 많은 사람이 차례 지내는 법을 몰랐다는 겁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차림 탓에 가계 부담이 커진다면 추석에 반드시 차례를 지내야 하는 걸까요? 가가례, 가정마다 염두에 둔 명절의 예가 다르겠지요.
*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라이프 스타일] 차례상에 현대식 그릇… 커피·피자도 올리고
중앙일보, 2018.9.4(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종가에서 아파트까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展
메트로, 2018.8.12(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가가례’ 설 차례상 차리는 법… 원리·원칙 알면 헷갈리지 않아요
매일경제, 2016.2.8(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청춘직설]‘추석 차례’ 가짜 전통과 싸워라
경향신문, 2017.9.13(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대추→밤→배→감? 차례상 과일, 종류-순서 따로 없었다
동아일보, 2017.1.27(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왜 “추석 차례 지내지 말자”고 할까
노컷뉴스, 2016.9.13(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7. [리얼푸드] “조상님, 차례상에 피자를 올려도 되겠나이까?”
헤럴드경제, 2015.9.24(자세한 내용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