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거의 민주주의, 옛 시민회관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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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안역 옛 시민회관 사거리 앞에는 ‘옛 시민회관 쉼터’가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곳은 한때 인천시민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인천시민회관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나신 인천 토박이라면, 시민회관에서 종종 상영하던 심형래, 김청기 감독의 영화를 보신 기억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민회관은 1994년 개관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 그 기능을 넘겨주었고, 2001년 건축물 노후로 철거되어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었지요. 이곳에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이름의 기념비가 몇 개 있습니다. 이것들은 공통으로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986년 5월 3일에 벌어졌던 ‘5.3 민주항쟁’입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3월부터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에 이어 개최된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직선제 개헌 추진을 위한 개헌 현판식을 계기로,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사회 각계의 다양한 요구가 폭발한 시위를 말합니다. 이전까지의 다른 지역에서 열린 개헌 현판식 집회는 최대 3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그러나 인천 5.3 민주항쟁이 이전 집회와 다른 것은 민주항쟁이 발생하기 직전에 일어난 4월 30일 여야 대타협에 대한 반발로, 정당 행사의 차원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의 요구가 직접 드러난 ‘중심이 없는’ 집회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시민회관에서 12시에 개최 예정이었던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은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된 시민들과 경찰들의 대치에 가로막혀서 열리지 못했고, 집회의 중심에는 학생운동을 진행한 대학생, 노동계, 종교계 등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이었습니다. 오후 5시 반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기까지, 짧게나마 시민회관 사거리를 중심으로 발생한 시위현장의 가장자리에서는 경찰과 경계를 놓고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반면, 안으로는 군사정권의 질서를 무너트린 해방구였습니다.

인천 5.3 민주항쟁 정신 계승비(좌)와 86년 5.3 민주항쟁 당시 모습(우)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나 도시의 한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저항의 주된 방법이었습니다. 1832년 6월 프랑스 파리봉기 배경으로 다룬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신 분들이라면 온갖 가구들로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2010년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을 강타한 ‘아랍의 봄(Arab Spring)’,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보름 넘도록 시민들로 메웠던 ‘2011 이집트 혁명’도 그 예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많은 노동운동가가 공장에서, 첨탑에서, 크레인 위를 점거해 왔고, 6월 항쟁에서는 시민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곳곳을 점령했습니다. 그것을 국가가 제한할 수 없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도시의 한 공간을 점령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의사표현을 하는 거대한 장치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Guattari)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전쟁’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철학자 이진경의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며 통합하는 것을 기능으로 하는 국가와 충돌하는 사태”를 이들은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들루즈와 가타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이 만든 현재의 질서를 ‘공간에 홈을 팝니다.’라고 합니다. 아무런 표시가 없는 맨 땅에 그어놓은 홈은 경계가 되고, 때로는 그곳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땅 위의 사람과 사물에게 홈으로 표시한 질서는 주어진 제약입니다. 이를테면 인천 송도 커넬워크 옆이나 서울 세종대로를 예로 들수 있습니다. 반면, 앞에서 이야기한 ‘전쟁’을 만드는 존재들(들루즈와 가타리는 이들을 ‘전쟁기계’라고 부릅니다)은 이 홈을 따르지 않고 다시 공간을 ‘매끄럽게’ 만듭니다. 권력은 전쟁기계를 제압해서 기존의 홈을 유지하든 포섭하여 새로운 홈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권력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때, ‘점거’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이고 강력한 투쟁이자 대화의 수단이 됩니다. 비록 작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질서에 저항하는 공간을 용인하게 되면, 전체의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면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자더라도 당장 수업을 하는 데 문제는 없겠지만, 그 학생을 깨우지 않는다면 곧 모든 학생이 자버리고 말겠죠. 행군할 때 한 군인이 발을 맞추지 않는 것을 너그럽게 봐준다면 부대의 제식은 곧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국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권력은 지속해서 작은 점령과 이탈을 찾아내어 다시 질서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질서 속으로 짓눌린 많은 사례만큼이나 새로운 질서를 만든 사례들을 보아왔습니다. 1871년 파리시민, 노동자들의 봉기로 구성한 ‘파리 코뮌’ 정부의 설립과 해체,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전자라면 그로 인해 촉발된 1917년 ‘러시아 혁명’과 ‘6월 민주항쟁’은 후자일 것입니다. 권력의 질서가 사람들의 생각을 외면할 때, 점거는 권력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시 공간 안에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점거의 방법을 택해 왔고 지금도 택하고 있습니다.

OWS(Occupy Wall Street: 월스트리를 점령하라) 는 1%의 월스트리트에 대항하기 위해 99%의 모두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좌) 일자리, 교육, 의료보험 등 모든 미국 사회의 문제제기와 토론이 이루어졌다.(우)

지금까지의 많은 점거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선택이었기 때문에 폭발적이고 단기적이었습니다. 많은 점거는 빠르게 소멸하였거나 혹은 빠르게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점거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의 예는 2011년 가을, 뉴욕의 경우입니다.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Occupy Wall Street, OWS)은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을 둘러싸며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월스트리트 부근의 주코티 공원을 점거하였습니다. OWS는 점거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쌓고, 밖을 향해서 버티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이는 열린 점거를 진행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금융자본의 욕심으로 인해 처한 자신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리버티 스퀘어(주코티 공원)’를 운영하기 위한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를 실험합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은 점거가 순간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리버티 스퀘어 안에서 음식을 기부받아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노래를 부르며 회의와 이야기를 합니다. 밤에는 침낭과 텐트 안에서 잠을 잡니다. 도시에서 각자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서 점거했던 것이죠.

2016년의 서울 또한 변화한 점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많은 시민단체가 집회를 추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무대를 설치하고 플래카드나 전단지를 만듭니다. 그러나 집회 선동자의 뜻에 따라 거리행진을 하고 점거의 가장자리에서 권력과 싸우는 등 과거의 점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각자 자유로운 발언을 하며 공감하는 시간을 만듭니다. 노동조합, 대학 학생회가 아닌 ‘장수풍뎅이 연구소’, ‘끝나고 치맥’과 같은 유머 넘치는 깃발의 등장은 점거한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투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들이 ‘전쟁기계’일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인천의 5.3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약 30년이 되었지만, 그 날을 한 번쯤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시의 투쟁적이고 공격적인 점거의 모습이 2018년의 모습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약자는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점거는 어떤 모습으로든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또 사라집니다. 오늘날의 도시 공간 속의 점거를 되돌아보고 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력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기 위해, 우리 도시에서 32년 전의 점거를 다시 기억해 봅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고병권(2012).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그린비
데이비드 하비(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이진경(2002), 노마디즘 1,2. 휴머니스트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2001), 천 개의 고원. 새물결
“그 날, 1986년 5월 3일”, OBS, 2017년 7월 1일 방송
이상철. 촛불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퀀스. 뉴스앤조이, 2017.9.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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