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확보>
잘 알려진 신화가 하나 있다. 메두사라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 얼굴은 굉장히 무시무시해서 단지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돌로 변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메두사의 얼굴은 의문에 부쳐진다. ‘실재’(The real)는 마치 메두사의 얼굴처럼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일일 연속극 속 인물들은 실재가 아니라 작은 진실 하나만 알게 되어도 돌처럼 굳어버리거나 뒷목을 잡고 픽 쓰러져버리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팩트(fact)’라는 저널리즘 용어가 일상생활 여기저기서 강박적으로 쓰이는 것처럼, 우리는 실재를 보고 싶어 하고 또 알고 싶어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팩트의 어원은 사실 ‘만들어진 것’이란 뜻의 라틴어 ‘faktum’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달 16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실재’를 주제로 한 공연이 열렸다. 앤드씨어터의 <실재의 확보>다. 이 공연에서 우리를 제일 처음 반긴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진이다. 그리고 무대 이곳저곳에는 그로테스크한 소품들이 있다. 처형을 위해 기둥에 묶인 사람,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 사체 곁에 망연자실 앉아있는 사람.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인물의 실상을 한번 파헤쳐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렇진 않아 보인다. 공연이 시작되면 이 소품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빛’을 받지 못한다. ‘멋있는 사나이’를 부르고 총검술을 하는 군인처럼 이 소품들은 빛을 받아야만 ‘작동’ 한다. 극을 끌어가는 건 앙상한 나무 두 개와 재봉틀이 설치된 탁자 그리고 스크린이다. 극에서 그녀(실재)는 사라진다. 팸플릿에 쓰여 있는 것처럼 “무대에 배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러했듯이.” 그리고 풍차(?) 같은 게 돌아간다. 기다란 등 네 개를 달아놓은 것이 휙휙 한참이나 돌아간다. 사실 여기에 커다란 의미를 두고 싶지 않은데, 이는 그저 극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표지로 쓰인 것 같기 때문이다.
바람은 풍차가 멈춘 뒤에 분다. 그 바람 사이로 이런 말이 들린다. “너는 누구냐?” 이 불길한 음성은 극 중간 중간 마다 반복해서 울려 퍼진다. 이 물음은 불안한 것이다. ‘누구’라는 인칭대명사는 말할 것도 없이, ‘너’라는 이인칭대명사가 무얼 가리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가 ‘박근혜’라는 인물이라는 지시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그게 ‘나’라고 하고 싶어진다.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이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아마 배우들이 연기했을) 인물들은 과거 18대 대선을 전후로 한 시간에 대해 증언한다. 그들 중 하나는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에 심취했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장려했다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외국에 있었기에 투표를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개미로서 테마주를 샀다고 말한다. 이 증언의 내용들은 우리의 경험과 다소 일치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너는 누구냐”라는 물음이 우리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나라가 이렇게까지 망해버린 데에는 환상을 믿어버린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실천을 시작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천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모두의 책임’이란 문제는 모든 얼룩소가 검게 보이는 밤처럼 악무한에 빠진다.
이러한 일반적인 서사가 아니라면, <실재의 확보>는 슬라보예 지젝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 중에는 지젝이 즐겨 쓰는 농담들이 인용된다. 그 중 하나는 시베리아로 일하러 가게 된 노동자 이야기인데, 그는 검열관의 눈을 피해 친구에게 그곳의 실상을 밝히려 고민한다. 그는 친구에게 편지가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고,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진실이라고 약속한다. 얼마 후 친구에게 파란 잉크로 쓴 편지가 도착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다. 자네들이 얻을 수 없는 것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빨간 잉크야.” 이 농담은 즉각적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증언에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내용’이 아니라 ‘증언’ 자체의 위상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그들의 증언은 공연 팸플릿에 쓰인 것처럼 “사실이면서도 허구일 수도 있고, 허구가 아닌 사실일 수도 있으며, 사실을 가장한 허구일 수도 있다.” 스크린이란 표면은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왜 스크린이란 표면과 거기에 영사되는 이미지는 이토록 자명한 것처럼 여겨질까? 예컨대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원격 현전된 이미지를 우리가 ‘진실’ 혹은 ‘거짓’이라 구분 지을 때도 그것은 여전하다. <실재의 확보>는 흡사 보드리야르식의 논하고 있는 것 같다. 스크린에선 중간 중간 맥주 광고, 3.11대지진, 9.11테러 이미지들이 나온다. 보드리야르는 원본이 시뮬라크르로 대체되면서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 생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서 원본의 값어치는 하락하다 못해 사라진다. 할리우드의 재난영화는 9.11보다 더 실재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혹은 9.11이 할리우드 재난영화처럼 이해된다. ‘최순실 게이트’가 한국 사회에 터졌을 때, 우리는 현실보다 더 리얼한 범죄영화는 이제 못 찍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보드리야르는 더 이상 실재는 없다고, 그것은 사라졌다고 종언을 고한다.
<실재의 확보>에서 재봉틀이 설치된 탁자는 유일하게 단단한 이미지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건 산업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증언이다. 거기엔 “계속 열리는 믿음”이 있다. 이 글귀는 응고되어있다. 그러나 그 응고된 문장마저도 무대 중앙에 설치된 나무들에 새겨진 글자처럼, 태블릿PC에 의해 해빙되고 흘러내리고 해체됐다. 그렇게 오늘날 우리가 딛고 선 지반(경주와 포항)은 흔들리는 중이다. 여기엔 모든 게 다 있지만, 내진 설계란 것이 없다. <실재의 확보>는 이러한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보드리야르적이지는 않다. 재봉틀을 놀리는 손이 바쁘게 새겨 넣고 있는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라는 글과 그걸 읊조리는 노래는 매우 절박하고 애절해 보인다. 이 이미지와 노래가 나오는 순간은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만약 실재가 사라졌다면 우리가 줄 수 있는 ‘진실의 전부’랄 게 있는가? 우리는 실재를 확보했는가? 아니, 확보할 수 있는가? 무엇이 실재라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실재의 사라짐을 단언해서도 안 될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던이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이, 실재의 사라짐은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실재는 ‘직접’ 볼 수 없는 것이지, 없는 게 아니다. 실재는 메두사처럼 그 스스로가 조각(예술)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글,사진/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박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