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남동구와 경기도 시흥시의 경계를 이루는 소래산은 보물 1324호로 지정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으로 유명하다. 소정방이 와서 소래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란 점에서 옛날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산이었다.
흔히 문학산을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주산(主山), 진산(鎭山)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도호부의 관아가 문학산 북쪽 가까이에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오해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도호부의 읍치에서 동쪽으로 24리 떨어져 있는 소래산이 진산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역 단위를 달리해 있고, 소래산 마애보살입상도 시흥시에 속해 있어 인천과의 관련성을 느끼기 쉽지 않지만, 소래산 전체를 비롯해 시흥시 북부를 포함한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인천도호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그런데 지난 2004년 시흥시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바로 아래 평지에 귀면(鬼面) 암막새 하나가 발견되었다. 막새는 기와로 지붕을 얹은 뒤 가장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처마 끝에 놓는 기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둥근 모양의 수키와에 연결되면 수막새, 넓적한 암키와에 연결되면 암막새라 하는데, 소래산에서 발견된 것은 암막새다.
소래산에서 발견된 귀면(鬼面) 암막새
귀신 모양이라고 하여 귀면(鬼面)이라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숙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치아를 다 드러낸 입이나 지나치게 작게 묘사된 코, 한쪽으로 쏠린 듯한 눈동자에서 약간은 바보스러운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이 완전한 형태는 아니고 크기도 가로가 11.8㎝, 세로가 5.3㎝, 두께가 2.2㎝에 불과하지만 다행히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 막새는 역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소래산 마애보살입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 같다. 거대한 벽에 새긴 보살상이 있으니, 그것과 연관된 사찰이나 관리용 건물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기와와 막새를 얹었던 것은 아닐까?
귀면 암막새 탁본
소래산이 고려시대에도 인천의 관할 구역이었고 그런 큰 공력을 들여 불상을 새길만 한 주체로는 인천을 본향으로 하여 고려 왕실과 통혼관계를 꾸준히 맺으며 세력을 떨쳤던 인주이씨 가문을 우선 떠올려 볼 수 있다. 비록 현재의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소래산과 주변의 유적, 유물을 인천의 역사라는 틀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소래산이 중요한 것은 인천도호부의 진산이란 것이다. 부평도호부의 진산이 부 관아 뒤쪽에 있는 계양산이었듯 대부분 지역의 진산과 관아는 가까이 있다. 그런데도 인천도호부는 가까운 문학산을 두고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소래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추정에 추정을 거듭하는 이야기지만 삼국시대 이래 인천의 읍치가 소래산 가까운 곳에 있다가 조선초기에 현재의 문학산 근처로 옮겨졌을 가능성은 없을까?
조선의 정조 임금은 재위 21년째인 1797년 8월 16일에 김포에서 출발해 수원 현륭원(사도세자 릉)으로 행차하는 도중에 부평도호부를 통과해 인천도호부 경내에 들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바람 깃발 휘날리며 해문을 돌아오니 / 風旂獵獵海門廻
소래산 좋은 경치에 눈이 번쩍 뜨이네 / 秀色蘇來眼忽開
높다란 군자봉을 서로 가리켜 보이어라 / 君子峰高入指點
혹 그 안에 숨은 인재가 있지 않을는지 / 儻非中有隱淪才
〈인천으로 가는 도중에 읊어서 부아에 걸도록 명하고 고을 수령 황운조로 하여금 쓰게 하다〉라는 제목처럼 이 시는 인천부사 황운조가 받아써서 도호부 관아에 걸어 두었을 것이다. 지엄한 임금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고, 임금이 직접 읊은 시이므로 관아에서도 격이 가장 높은 곳에 두었을 것이다.
이처럼 소래산은 인천의 역사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역사적으로 계양산과 문학산이 주목받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래산에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인천광역시의 옛 역사를 온전히 살펴보려면 강화군과 옹진군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계양산, 문학산, 소래산을 같은 수준에서 조사하고 연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