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해요 신기하리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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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의 작은 일탈, 크리스마스 마켓

“승연! 드디어 뮌스터(Münster)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어.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은 정말 유명하거든. 꼭 가봐야 한다고!”

쉐핑헨 레지던시의 사무실 직원 우타(Uta)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우타는 쉐핑헨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뮌스터에 산다. 최근 우타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뮌스터 크리스마스 마켓 이야기를 계속 들었기에 마켓이 열리면 뮌스터에 나가 봐야지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사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의아했다. 이미 런던 유학 시절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여러 번 본 터라 아마 독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 거리는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사람들은 한껏 들떠 쇼핑하러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쨌든 심심하고 건조한 독일인들이 이토록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뭔가 색다른 게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게다가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의 역사는 6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하니, 흠… 덩달아 기대가 된다.

스산하게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쉐핑헨에서 S70번 버스를 타고 뮌스터로 향했다. 쉐핑헨에서 뮌스터까지 버스로 1시간이 걸리고 왕복해서 12유로다. 저렴한 독일물가와 비교하면 꽤 비싼 편이다.
어쨌든 뮌스터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싶어 아침 일찍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쿠키를 건넨다. 흩날리는 비를 뚫고 뮌스터에 도착했다. 뮌스터에선 11월부터 크리스마스 마켓 다섯 곳이 열린다. 도시 곳곳에 붉은 장식품이 눈길을 끈다. 거리 한쪽에 작은 통나무집 모양을 한 상점이 줄지어 섰다. 힐끗힐끗 살펴보니 작은 수공예품과 털모자, 장갑, 컵 등을 거리에서 소소하게 판다. 한쪽에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따뜻하게 데워진 글루바인(Glühwein)을 홀짝홀짝 마신다. 음식이라고는 커리브로스터(Currywurst) 와 감자튀김이 전부다.

뮌스터 크리스마스 마켓

달걀에 끼워 준 크리스마스 초콜릿

뭐지? 우리나라 명동의 길거리 마켓보다 훨씬 한산해 보이는데… 이게 특별하다고?’ 

 심드렁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밝다. 어떻게 보면 아주 소박한 크리스마스 마켓에 잔뜩 들떠 있는 독일인들이 참 귀엽다. 한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에 길거리 노점상을 즐기는 독일인들에겐 작은 일탈이었다.
크리스마스 전통은 독일에서 시작됐다던데, 크리스마스를 독일에서 보낸다고 하니 유럽의 다른 친구들은 전통 크리스마스를 보겠구나 하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막상 독일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참 소박하고 간소하다. 평소와 다르게 길에서 따뜻한 글루바인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소소한 물건을 팔러 나와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 작은 이벤트가 독일인들에겐 크리스마스마다 해 오던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고 누군가에겐 종일 쇼핑만 할 수 있는 날이며, 누군가에겐 글루바인이나 쿠키와 커리부로스터가 있는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라는 사실 그 자체로 설레는 것 같다. 화려하고 눈부셨던 런던의 크리스마스와 달리 소소하고 심심한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지나 뮌스터의 구시가지를 걸어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인기 있던 감자튀김과 커리부러스트

비스킷으로 치장한 뮌스터 

뮌스터의 구시가지는 참 예쁘다. 정말 너무 완벽해서 이상하리만큼 예쁘다. 건물 못지않게 도시 바닥도 예쁘다. 만질만질한 돌바닥을 보니 수백 년 전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 오래된 돌바닥 위로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볍게 달린다. 런던처럼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고 파리처럼 지저분한 쓰레기가 굴러다니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차분하게 정리돼 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 마켓에 테러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빼면 마치 세트장처럼 모든 게 완벽하다.  

뮌스터 거리

그런데 자세히 둘러보니 도시 전체가 꼭 얇은 비스킷으로 둘러싸인 것 같다. 구시가지의 건물 앞면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찍힌 비스킷 같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뮌스터의 구시가지 거리는 모두 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뮌스터는 도시의 반 이상이 전부 부서졌다.
이후 사람들은 원래 건물을 바탕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뮌스터 구시가지엔 건물 48개가 새로 지어졌다. 말이 구시가지이지 사실 새로 지어진 거리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오래전 거리를 잘 살렸다.
몇몇 건물의 앞면은 뒤쪽에서 철봉으로 받쳐 놓았다. 건물마다 문양도 찍혀 있다. 유럽의 오래된 가문들처럼 건물마다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꽤 인상 깊다. 각 건물에 이야기가 담긴 오래된 로고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나도 언젠가 집을 짓게 된다면 꼭 이런 문양을 만들어 새기고 싶다. 게다가 건물의 지붕 형태도 전부 제각각이다. 뾰족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층층이 나뉘어 있기도 하다. 가끔 건물 꼭대기에 사람이 조각돼 있다. 멍하니 건물 하나하나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간다.

2차 세계대전 후 부서진 뮌스터 거리

 
건물 앞면을 철봉으로 비스듬히 받쳐 놓은 모습   비스킷 같은 뮌스터 건물 앞면

건물에 새겨진 문양

해가 지자 건물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물론 예쁘다. 뮌스터에서 만난 가이드 아네트는 구시가지 쇼핑거리에서 파는 물건들을 계속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가게에서 파는 화려한 물건들보다 건물에 더 호기심이 간다.

알다시피 뮌스터는 10년마다 열리는 조각전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이 남아 있다. 조각들이 도시 일부로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정겹게 도시에 어우러진다. 너무 예쁘고 완벽해서 마치 트루먼 쇼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온 도시가 아름다운 비스킷으로 둘러싸인 듯한 환상을 준다. 뮌스터의 밤이 깊어 간다.

뮌스터 거리

뮌스터 조각전이 끝난 후 거리에 남은 공공예술작품

LWL로 오세요

독일에 온 후 특히 쉐핑헨에 머물며 독일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매일 쉐핑헨에서 자전거를 타고 동물들을 만나며 시골생활에 흠뻑 취했다. 그렇기에 뮌스터 거리를 걷다 만난 새하얀 건물 엘베엘 미술관(LWL)을 사실 큰 기대 없이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산타클로스(세인트 니콜라스)가 나를 맞이한다. 그런데 그동안 많이 보던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삐뚤빼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다. 설명을 읽어 보니 어린이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가가 다시 만든 조각 작품이다. 왼쪽에는 착한 일을 한 친구에게 줄 선물 보따리를, 오른쪽에는 익살스러운 블랙 피터(까만 얼굴과 복장을 한 채 회초리를 들고 세인트 니콜라스를 따라다님)를 데리고 있다.

LWL미술관 미술관 입구에 놓인 산타클로스 작품

산타클로스를 지나 LWL미술관 전시장으로 향했다. 1층에는 백남준의 작품을 비롯해 현대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새하얀 벽에 걸린 현대미술 섹션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이 나왔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며 신전처럼 느껴진다.
밖에서 봤을 땐 모던한 건물이었는데 2층 내부는 너무 멋지게 르네상스 시대의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바닥에 놓인 어느 작가의 설치 작품이 눈길을 끈다. 다름 아니라 A4 종이다. A4 종이를 깔아 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표현했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바닥에 깔린 종이 설치작품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LWL미술관은 현대미술뿐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게다가 미술관 건물 자체가 참 우아하다. 이곳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본부로 더욱 유명해진 미술관이라고 한다.

A4 종이를 사용한 설치작품과 미술관 내부

모던한 LWL미술관 내부

결국 시간에 쫓겨 LWL미술관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나왔다.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다 뭔가에 홀린 듯 몇 시간을 보내고 나온 것이다. 뮌스터와 참 잘 어울리는 미술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자태를 뽐내는 모던한 건물의 외형에다 잘 정리된 미술작품 콜렉션과 세련된 건물 내부 한쪽은 오래된 르네상스 형식의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오묘하게 잘 어우러진 곳이다. 공공장소에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 예술작품들과 깨끗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뮌스터 거리의 모습이 미술관과 정말 닮았다.

뮌스터는 내게 이상하리만큼 완벽한 도시로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비스킷처럼 달콤하고 맛있지만 쉽게 부서질 것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너무 완벽해서 어느 순간 쉽게 부서질지도 모르는 그런 도시 말이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부서진 도시를 이토록 멋지게 재건한 독일인들을 생각하면 이 환상적인 도시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이런 도시에 사는 독일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에서 사람들과 소소하게 와인을 마시고 연주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게 특별한 일이라니…. 참 신기할 뿐이다.
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할 수 있는 그들의 작은 일탈이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이곳에서 만나는 독일인들마다 뮌스터의 크리스마스를 설레는 목소리로 이야기 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3일간 머물던 뮌스터를 떠나 쉐핑헨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탄다.

글 / 이승연
사진 /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 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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